[373] 무진기행(霧津紀行)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373] 무진기행(霧津紀行)

0 개 2,398 KoreaTimes
  무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Ⅰ. 스무살 무렵,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만났다. 주인공 윤희중, 그는 산업화가 막 시작된 1960년대의 전형적 인물이다. 출세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계략도 꾸미는 속물이며, 욕망과 경쟁이 삶의 대부분인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가 현실에서 일탈하고 싶을 때, 혹은 기쁠 때 찾는 곳이 그의 고향 '무진'이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소설 속의 묘사처럼 도저히 '헤쳐버릴 수 없는 안개' 속의 삶이 곧 우리들 인생이어서, 나는 '무진'과 금세 친숙해졌다.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가, 재수까지 한 자식놈이 대학입시에 합격할까, 뉴질랜드 이민 문은 언제나 열리려나, 이자율은 떨어질까 올라갈까, 집을 살까 팔까, 내 자식들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까, 오늘 저녁은 뭘 해먹지?'

  옅은 안개, 짙은 안개가 해답을 살짝 보여 주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나는 소설 '무진기행'을 옛사랑처럼 껴안고 살았다. 작가의 감수성과 감각적 표현이 잘 벼려진 칼로 싹 잘라진 볏단이거나 맑고 청량한 밤하늘의 별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로니칼하게도 안개 속의 풍경을 그려 낸 그의 소설은 보송보송하기만 하다.

  Ⅱ. 소설 '무진기행'은 1967년,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안개'로 영화화 되었다(막내 동생이 'EBS명화극장'에서 녹화 떠서 보내 주었다). 밤안개가 자욱한 무진의 어느 갈림길, 윤정희가 신성일에게 “저를 바래다 주시지 않겠어요?” 유혹의 실마리를 던진다. 그를 이용해 무진을 탈출하고 싶어서. 뭐가 뭔지 답답하기만 한 삶, 그래서 “나를 도시로 데려가 줘요” 애원하는 윤정희. 오래된 필름의 뿌연 기운에 안개마저 덮친 무진, 정훈희의 노래, 밤길 더구나 갈림길,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는 여자, 나는 ‘헉’ 숨이 막혔다.

  사람들은 지독한 안개를 빌미 삼아 깊은 잠 속에 빠지기도 하고,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원초적 욕망에 몸을 내맡기기도 한다. 동이 터서 시야가 좀 확보되면, 어디론가 떠나야 겠다고 짐을 꾸리기도 하고, 안개가 침입하면 짐 보따리를 다시 풀기도 한다.

  안개는 그랬다. 짙은 장막을 드리우고 사람들을 가뒀다. 한발자국도 헤쳐 나가지 못한다고, 만약 한발 내딛기라도 한다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거나, 깊은 늪으로 빠질 지도 모른다고 협박한다.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짙은 안개는 음흉하게 최면을 건다. ‘안개가 싹 걷히면 희망하고 기대했던 모든 것이 네 앞에 드러날 거야.’

  안개여, 어리석게도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Ⅲ. 그 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신촌역 근처의 '무진기행'. 코끝이 얼얼하게 추운 겨울날, 무작정 신촌 뒷길을 걷다가 나는 ‘무진기행’이라고 부옇게 달떠 있는 네모난 등불을 만났다. 반가웠다. 카페 이름이 ‘무진--’이라니.

  낡은 문을 밀고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다락방 같은 실내에는 난로가 있었고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주인은 머리가 허연 중년 아저씨였고, 안주인은 윤정희 같은 단발머리의 앳된 여인이었는데, 자칭 '빈궁마마'(자궁을 들어냈다)였다.

  나는 따끈한 차를 마셨다. 벽에는 동자승의 사진이 검은 안개에 싸인 듯 오래 되어 낡은 모습으로 애닯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윤희중이 무진의 안개 속으로 숨어 들 듯, 자주 그 곳에 갔었다. 허깨비 같고 불안하고 쓸쓸했던 날, 혹은 나의 기쁜 생일날. 즐거워지면 주인 아저씨는 섹서폰으로 패티김의 '빛과 그림자'를 연주했다.나는 안개처럼 뿌연 입자로 흩어져 평화롭게 무진을 떠돌았다.

  사는 일이 잘 닦인 유리창처럼 명확하고 똑 부러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합리적이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며, 미래도 확실히 보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롯이 길이 보인다면---실패도 절망도 없고 타인 때문에 내가 답답해질 일도 휘둘릴 일도 없을텐데.

  안개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모닥불을 피워 증발시킬까, 대형 선풍기를 돌려 날려 버릴까. 지금까지 아무도 안개를 물리쳤다는 사람은 없다. 안개가 없다면 진정 행복할까? 아니, 끔찍했다. 수술대 위 환자의 환부를 모자이크 처리 없이 볼 때처럼.

  이길 수 없다면 타협해야 한다. 어릴 적 연막차를 쫓아가며 즐거워했던 것처럼, 안개, 밤안개, 물안개, 안개 속의 데이트, Foggy Highway---노래를 즐겼던 것처럼, 검은 커피 속에 하얀 우유나 생크림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Runner's High

댓글 1 | 조회 2,523 | 2009.02.10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겨울날에는 먹을 것이 귀하기 마련이다. 과일도 야채도 해산물도---. 그래서 동물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잔뜩 먹고 새로운 먹거리가 돋아나는 … 더보기

Angry Birds

댓글 4 | 조회 2,513 | 2012.04.24
시인 타고르는 한국을 ‘동방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칭송하였다. 한국이 정적으로 묘사돼 못마땅해 하는 이도 있지만, 떠오르는 해처럼 동방… 더보기

[379] 샴 트윈(Siamese Twin)의 비극

댓글 0 | 조회 2,506 | 2008.04.22
아주 오래 전에, 그러니까 한 20년쯤이나 되었을까, 나는 신문을 읽다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 빠졌다. 1811년, 당시 태국의 이름은 '샴(sia… 더보기

이방인

댓글 1 | 조회 2,500 | 2009.10.27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뫼르소는 동료의 싸움에 휘말려 불량배 한 명을 사살하게 된다. 뫼르소는 법정에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 더보기

[346] 천국을 한 병씩 나눠 드립니다

댓글 1 | 조회 2,492 | 2006.12.11
시인 바이런이 말했던가. ‘와인과 모짜르트와 책이 있는 곳이 천국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세계적 와인 수출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곳 뉴질랜드가 천국임에 틀림없다.우… 더보기

[359] 언 발에 오줌 누기

댓글 1 | 조회 2,489 | 2007.06.25
중국에서 온 이웃집 새댁이 햇살이 내리 쬐는 벽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웃으며 햇살이 따뜻하다고 말했다. 사연인즉 전기요금… 더보기

베짱이에 관한 오해

댓글 1 | 조회 2,467 | 2009.07.15
뉴질랜드 경제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6월 26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올 일분기(3월31까지) 실업률이 5%에 육박했다.국내 총생산(GDP)도 전 분기 대비 … 더보기

[369] 영혼의 지팡이(Ⅰ)-마두금 연주를 듣다

댓글 0 | 조회 2,456 | 2007.11.27
거짓말처럼, 어미 낙타의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아기 낙타를 품에 들이고 젖을 물렸다. 며칠 전, 어미 낙타는 새끼를 낳았었다. 오랜 시… 더보기

Ball Boy

댓글 1 | 조회 2,454 | 2009.11.10
봄인데 전혀 봄날 같지 않은 날씨군요. 식구들이 온돌 매트에 등 바닥을 붙이고 좀처럼 일어나지를 않네요. 따끈한 생강차에 꿀을 한 술씩 타 먹인 후 등 떠밀어서 … 더보기

[343] 식물의 사생활(2)---넌 어느 별에서 왔니?

댓글 1 | 조회 2,431 | 2006.10.24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T를 떠올려본다. 눈이 얼굴의 전체를 차지할 만큼 크고 주름투성이인 ET가 긴 손가락을 내밀어 인간의 손가락과 조우하는 순간, 지구인들은… 더보기

시간이 없다!

댓글 0 | 조회 2,401 | 2009.03.10
일본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은 자신이 꾸었던 꿈을 소재로 '꿈(こんな 夢を 見た)'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8편의 단편 영화로 이루어진 '꿈'은 저마다 인상… 더보기

현재 [373] 무진기행(霧津紀行)

댓글 0 | 조회 2,399 | 2008.01.30
무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Ⅰ. 스무살 무렵,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만났다. 주인공 윤희중, 그는 산업화가 막 시작된 1960년대의 전형적 인물이다. … 더보기

[377] 나는 걷는다

댓글 1 | 조회 2,383 | 2008.03.26
기차가 얼마나 게으름을 피웠던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보따리를 이고 들고 앞장섰고, 나는 무섬증에 솜털이 보소송 일어나서 그 뒤를 … 더보기

[374] 남 섬에서 만난 세 남자

댓글 0 | 조회 2,380 | 2008.08.13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호방한 웃음, 그가 오른 산 만큼이나 우뚝한 콧날---뉴질랜드 지폐 5달러짜리에 인쇄된 남자, 에드먼드 힐러리경이다. 그는 1953… 더보기

당신을 희망의 메신저로 임명합니다

댓글 3 | 조회 2,372 | 2012.06.12
---- 코리아 포스트 창간 20주년에 부쳐 지구 밖 6천Km 상공에서 찍은 우주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구는 진애(塵埃)에 불과했지요. 마치 햇살 좋은 날… 더보기

측은지심이 으뜸

댓글 0 | 조회 2,371 | 2008.11.25
나의 친정 엄마는 '불쌍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교통 사고로 아들을 앞세워 보낸 외삼촌도 불쌍해 죽겠고, 천식으로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데 개미새끼 한 마… 더보기

산골짜기 불빛

댓글 0 | 조회 2,355 | 2008.12.23
나는 지리산 골짜기로 토꼈습니다. 비속어를 사용해 죄송하지만 가끔은 비속어 한 마디에 내 영혼이 카페인이라도 들이킨 듯 반짝 빛납니다. 내 방 앞을 흐르는 강물은… 더보기

[368] 하버브리지

댓글 0 | 조회 2,347 | 2007.11.12
오클랜드 하버브리지의 안전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2006 베카 엔지니어링의 보고서는 클립온(바깥 상하행 2개 차선)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Transit … 더보기

[348] 향기(香氣)를 찾아서 - 기억(Ⅰ)

댓글 1 | 조회 2,344 | 2007.01.15
향기는 언제나 내 주변에 가득하다. 바람 따라 허공의 이곳 저곳을 떠돌기도 하고 가라앉아 있기도 하다가 소용돌이 치다가 내 코 속으로 기어드는 것이다. 우연히, … 더보기

누가 더 똑똑할까?

댓글 5 | 조회 2,340 | 2011.09.13
내 친구 농장에는 염소가 두 마리 있다. 수놈은 염식이, 암놈은 염순이다. “염식아, 염순아아---!”여기저기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들판. 퍼져나가는 친… 더보기

[363] 아! 버나드 쇼

댓글 0 | 조회 2,337 | 2007.08.28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다. 아일랜드 태생의 작가인 죠지 버나드 쇼를 꼭 한 번 만나는 일이다. 깡마른 몸에 희고 긴 수염, 지팡이가 트래이드 마크인 쇼. 형형한 … 더보기

[382] 행복한 밥상을 위한 투쟁 (Ⅲ)

댓글 0 | 조회 2,332 | 2008.06.10
세계 제3차 대전은 식량 전쟁이다. 대한민국은 그 전쟁 중에 이미 핵폭탄을 두어 방 맞았다. 미국산 쇠고기로 한방 맞고, 5월 1일, 미국산 유전자 변형(GM)옥… 더보기

[376] Sparkling과 100% Pure

댓글 1 | 조회 2,318 | 2008.03.11
한국 관광 홍보 영상 '코리아 스파클링'이 1월 31일, 세계 3대 영상제인 '뉴욕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양방언씨의 모던 한 가야금 연주에 전통과 현대… 더보기

좋은 일, 나쁜 일, 이상한 일

댓글 0 | 조회 2,317 | 2012.09.25
수십 년 영화를 만들었고, 거장이라 불렸지만 영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김기덕 감독도 ‘아리랑’에서 &lsq… 더보기

길 위에서 만나다

댓글 0 | 조회 2,309 | 2008.12.10
잘 살고 있어? 헤어진 옛 애인이 전화를 걸어와 괜스레 안부를 물으면 여자는 '그저 그래' 라고 대답하는 샹송이 있다. 슬픔이 촉촉히 베어 있는 음성으로 노래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