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비상 배낭 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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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비상 배낭 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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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달 전, 우체통에서 'Household Emergency Checklist'라는 제목의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비상사태에 대비해 비상 용품을 준비해 놓으라는 것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늘은 푸르고 초목은 우거지고 바다는 잔잔한데---. 방심은 금물! 아름답고 '친절한 금자씨'같은 자연은 그러나 지금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 땅 속, 바다 속,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결코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수상하다.

  한국은 봄 가을이 몇날 되지 않는 아열대 기후로 바뀌고 있다. 봄에는 황사에 시달리고, 여름엔 너무너무 더워 사람들은 지쳐 버린다. 중국은 국토의 4분의 1이 사막화되어가고 있다. 그 사막이 점점 동쪽으로 번지고 있어 대책이 세워지지 않으면 한반도가 모래더미에 파묻힐지도 모른다고.

  뉴질랜드도 이상 기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봄이 되어 꽃들이 피어나던 지난 달 24일, 직경 20mm나 되는 우박이 오클랜드를 비롯 몇 곳에 쏟아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갑자기 돌풍과 비바람이 몰아쳐 내 집은 우지끈우지끈 소리를 낸다. 나는 전기가 나가지 않을까, 지붕이 날아가지 않을까, 홍수가 나지 않을까, 염려 속에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또 9월25일, 북섬의 루아페후 화산이 폭발해 스키장과 등산로가 폐쇄되었다.

  과거에는 전쟁, 내란 등으로 비상사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래에는 자연 재해로 인한 비상사태가 대부분이다.

  지난 8월에는 세계인이 아끼는 문화유산의 보고인 그리스에 산불이 발생, 국토의 절반이 불바다가 되었다. 170곳 이상에서 맹렬히 불길이 번져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총리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작년 6월에도 인도네시아에서 지진이 발생, 이재민이 20만 명이나 되어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사실은 사람보다 먼저 동물들, 식물들이 비상사태에 직면했다.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익사하는 모습을 TV에서 보았다(때문에 북극곰은 개체수가 확 줄어 들었다고 한다). 간신히 팔로 끌어안을 만큼 자그마한 빙하에 몸을 의지하고 망망대해에 떠 있는 북극곰, 마치 튜브를 끌어안고 바다에 내던져진 아이처럼 가여워 보였는데, 그 생명줄인 튜브가 녹았다. 지구온난화로 2050년에는 지구 생물의 20-30%가 멸종한다고.

  뉴질랜드에서 전쟁이 벌어질 일은 희박하다고 생각되지만, 화산 지역이고 섬 나라이기 때문에 지진과 이상 기후 측면에서는 안심할 수 없다. 결국 나는 비상 배낭을 꾸리긴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몇 달 째 생각만 하고 있다. 나의 고민은 비상시 달랑 들고나갈 자그마한 가방에 무엇을 집어 넣느냐는 것이다. 나라마다, 또는 어떤 성질의 비상 사태인가에 따라 챙겨야 할 물건이 다르다. 한국의 '국가 비상 기획 위원회'---식량과 취사도구, 침구 및 의류, 라디오, 소독약 붕대, 화생방전에 대비해서 방독면 수건 마스크 비닐옷 해독제 등. 뉴욕시 재난 관리국---방수 용기에 담은 중요서류 사본, 자동차 열쇠 및 집 열쇠, 각종 카드, 생수와 잘 부패되지 않는 식품, 손전등과 라디오 핸드폰 배터리, 구급상자, 신발과 비옷, 가족과 어떻게 연락하고 만날 것인가에 대한 정보,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 육아용품, 노인 장애우 가족의 특별용품 등. 호주는 지난 9월 APEC(아태경제 협력체)을 앞두고 기상이변 대비 Let's Get Ready Sydney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우선 비상시 안전 지구로 대피하고 중요한 품목은 평상시 '비상서랍'에 넣어 둘 것을 당부했다. 손전등, 전화카드, 라디오, 해열진통제, 응급용품, 화장지, 개인연락망, 소액 현금 등. 고양이는 면으로 된 베개 커버에 넣어 갈 수 있다고 자상하게 안내하고 있다.

  남편에게 비상시 챙겨 가고 싶은 물건을 물었다. "술!" 얼마 전 막내 영은이가 서울에서 사 온 비싼 양주를 어찌 버리고 가겠냐는 것이다.

  아들에게 물었다. "노트북!" 19인치 화면에 끝내 주는 성능, 현장음처럼 생생한 오디오까지 갖춘 그놈을 어찌 버리고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맞는 얘기였다. 나는 화장품과 글 쓸 모티브를 메모해 놓은 노트, 따뜻한 담요를 가져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추위를 유난히 타는 내가 옥돌매트나 온돌 판넬을 못 가지고 가는 것이 못 내 아쉬웠다. 내가 아는 언니는 신발과 액세서리를, 또 다른 지인은 아끼는 옷을 챙겨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것들을 다 챙긴다고 생각하니 그게 무슨 비상 배낭인가, 이삿짐을 싸고 있는 거 아닌가! 남편은 또 생각 난 듯이 말했다. "라면, 휴대용 가스렌지, 김치---, 참, 라면 끓일 물도 있어야지." 앓느니 죽지, 비상용품 챙기는 거야, 소풍 가는 거야?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집안을 휘 둘러보니 뭐 이리 살림살이가 많은지---그것들에 나는 매일매일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그 질긴 욕망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지 않는 한, 비상 배낭은 꾸릴 수 없을 듯 했다. 나는 비상 '배낭 꾸리기'라는 명제를 '비상 배낭 덜어 내기'로 바꾸었다.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그 버린 것에 미련조차 깨끗이 사라지는 날, 그 때 나는 한결 홀가분해지고 기쁜 마음으로 비상 배낭을 꾸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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