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가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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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가을달

suk18530
0 개 106 이경자

보름인가? 창공에 매달린 달이 유난히 크고 밝다. <은하수와 가을달> 칠십여 년 전 초등학교 때의 어느 습자 시간에 화두로 떠올려졌던 단어다. 그때의 습자 시간은 딴 과목과 달리 일주일에 두 시간씩 연이어 있었다. 첫 시간엔 신문지나 허름한 종이에 연습을 하고 둘째 시간엔 갱지에 정서를 해서 덜 마른 먹이 혹여 번지기라도 할까 칠판 앞에 겹치지 않게 주욱 늘어놓는다.


일찍 끝낸 아이들은 볕 좋은 창가에 모여 조용히 수다를 떨기도 하고, 또 다른, 미처 끝내지 못한 아이들은 숨죽여 한 획씩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쩌다 먹물이 옷에 묻기라도 하면 밥알을 짓이겨 바르는 소동이 일기도 하고, 앞자리에 앉은 아이의 등짝에 붓으로 원치 않은 수묵화가 그려지기라도 하면 작은 시비가 붙기도 했었다. 그때 갑자기 창가에 모여 서서 수다 떨던 아이들 쪽에서 뱅글뱅글 누굴 향해 놀리는 듯한 웃음을 웃는다.


한 아이가 “은하수 가을달”의 점을 안 찍어 “은히수 가을딜”이라 끝을 맺고 칠판 앞에 펴놓았기 때문이다. 그 웃음들은 순식간에 퍼져 온 교실이 술렁거렸다. 나는 “어쩜 좋지? 끝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저걸 언제 다 쓰냐?”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제야 글 쓴 아이는 그걸 알아차렸다. 아이라고는 했지만 나보다 세 살이나 더 먹은 언니뻘이었다. 그 시절엔 전란으로 학령기를 놓친 애들이 서너 살씩 어린 우리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하곤 했었다. 주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체격도 크고 또 의젓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동급생으로서보다는 언니처럼, 이모처럼 조그마한 나를 잘 챙겨 주던 그 애, 아무튼 그 애는 당황해하지도 않고 붓에 먹을 꾹꾹 묻혀 들고 성큼성큼 칠판 쪽으로 가더니 “히”자에 점 하나, “딜”자에 점 하나를 찍고는 주전자 두 개쯤 걸 수 있게 입을 내밀고, 양손은 먼지털 듯 흔들고 또, 양발로는 교실 마루를 쾅쾅 구르며 제자리로 돌아오더니, 책상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사람의 입이 저렇게 튀어나올 수도 있구나. 또 교실에서 저렇게 크게 울어도 되는구나 하는 것을… 그동안 어린 것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마음에 맺혔던, 또는 부끄럽기도 했었을 그 어떤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올라온 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세월이 많이 지난 먼 훗날이었다. 나는 작은 손으로, 너른 그녀의 저고리 등을 쓰다듬으며 창가 쪽에 머쭘하게 서 있던 머슴아들을 으쓱하는 기분으로 흘겨보았다. 


“니들은 얘가 처음부터 다시 쓸 줄 알았지? 점 두 개로 ‘은히수 가을딜’을 ‘은하수 가을달’로 만드는 것 봤지?” 하지만 지금 고백하는데 나도 그땐 신묘한 그녀의 처리 방법에 놀랍기만 했었다. 그날 그 애와 나는 교정에 있는 키가 엄청나게 큰 미루나무 꼭대기에 빨간 노을이 깃발처럼 걸리고, 참새 수천 마리가 노을 속에 작은 점으로 요동칠 때, 아무도 없는 너른 운동장을 가로질러 늦은 귀가를 했었다. 슬픈 일을 치른 모녀지간처럼…


오랜 세월 그 후 나풀대던 검은 단발머리가 파뿌리처럼 희어지고 삶의 가장 바쁜 노정에서 가끔 기웃대긴 했어도 붓을 잡아 볼 기회는 별로 갖질 못했다. 더구나 삶의 뿌리를 옮기는 이민 과정에서의 부침이랄까 힘듦으로 붓글씨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서울 같았으면 쉽게 전시회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겠으나 여기선 전시회조차도 보기 어려웠고 어렵사리 처음으로 찾아가 본 서예 전시회가 있었다. 연향회 이십 주년이라 했다. 그런데 방명록에 쓴 첫 글자부터 먹의 묽기 조절을 못 해 확 번지고 만다. 그와 함께 나의 정체성과 관심만 가졌었지 뭘 하며 살았나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들었다. 부끄러웠다.


언제부턴가 뒷뜰의 흙놀이가 물리적으로 버거워지고 있던 터였다. 가물면 물 주고 한없이 돌봐 주고프던 저 많은 화초와 화분들의 거취를 생각할 만큼…… 중고 그릇 사다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만들고 싹을 틔우고, 나누고 즐기던 모든 일들이 버거워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 집 앞에 식물이 심겨진 그대로 화분째로 놓고 가기도 하고, 나 또한 길에 내놓은 화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워 와 아이 보살피듯 거두기도 했었는데…


그날 집에 돌아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서예 도구들을 찾아보았다. 이십여 년 전 한국에 계시던, 지금은 돌아가셔서 안 계신 형부가 중국 출장 중 사 와서 이곳 뉴질랜드로 보내 주신 것들이었다. 아마도 형부는 처제가 하고팠던 것이 무엇인지 간파하셨던 듯 문방사우를 잊지 않고 챙겨 보내 주셨지만 그땐 그걸 활용할 만한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 상황이었고 살기에 바빴다. 거기에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까지… 그러는 동안 꽤 고급인 것 같은, 용트림 문양이 양각으로 채색되어 있던 먹은 세 동강이 나 있었고, 화선지는 뭉텅이에서 한두 장씩 뽑아 부엌에서 튀김 요릴 하거나 전을 지질 때 다 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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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대로 문방사우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너무 빠져드니까 아는 동생은 서울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누님이 가장 좋아하는 분의 서예 교본을 주문해 주기도 하고 어떤 분이 소장하고 있던 화선지도 도움을 받았다.


나는 지금 그림 같은 내가 꼭 써 보고 싶던 흘림궁체와 열애 중이다. 맘에 드는 필체의 선생님의 영상을 소환해서 밤낮으로 히죽대며 보고 또 쓴다. 쓰다 보면 빼먹고 쓰고 쓴 거 또 겹쳐서 쓰고, 줄은 삐뚤어지고… 왜인진 나도 모른다. 그래도 자꾸 쓴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쁘다 했다. 내가 요즘 많이 바쁘다.


천여 년 전 고려 말의 나옹선사의 청산가를 청해 옮겨 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21세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한 무상함을 느껴 쓴 시라 하는데 여럿 사랑하는 이들을 앞세웠음에도 나는 아직도 그 경지는 요원한 듯, 잘 써 보고 싶은 욕심만이 드글드글하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무관심한 듯 하는 어떤 이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옮긴다.


“사랑은 머물지 않는 바람. 무심의 바위인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어둠의 분신인가. 세상에 다시 태어나 사랑이 찾아오면 가슴을 닫고 돌아서 오던 길로 가리라 오던 길로 가리라.” 라고 써 본다. 곱고 사랑스러운 노랫말들이 나를 찾아오면 검은 먹을 찍어 글자로 그리듯 옮겨 쓴다. 내일이 오늘이 되도록…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그대로 두듯이…~~~옛 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 보네.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 보네.”


옛 선인들이나 시인들의 멋진 글귀가 아니어도 좋고, 예쁜 글들은 너무 많다. 내가 쓰고 또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고… 오늘처럼 해맑은 날이면


“꽃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이렇게 좋은 날엔 이렇게 좋은 날엔,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꽃밭에 앉아서…”


가수의 청아한 목소리가 아니어도 뉴질랜드의 맑은 공기는 나를 간절하게 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뒷뜰에서 하던 일 멈추고 챙 넓은 모자를 벗어 가슴에 얹고 간이 의자에 눕는다. 바지랑대 끝에 매달린 흰 구름 한 조각이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저 구름은 어디에서 구름 되어 어디로 가는 걸까? 확실한 건 언젠가는 소멸될 수증기일 뿐인데 우리의 삶처럼…” 좀 전 화단가 화산석에 긁혀 쓰라린 무릎을 내려다본다. 어느 아이는 무릎의 빨간 색이 피인 줄 알고 와앙 울고 보니 꽃잎이었다는데, 나는 꽃잎인 줄 알았는데 가는 한 줄기 피가 맺혔다 말라 가고 있었네.


여름은 끝났는가? 매미 소리가 뚝 끊겼다. 칠 년을 애벌레로 살다가 매미 되어 겨우 칠 일을 노래하다 가는 매미는 무슨 생각으로 이 여름을 보냈을까.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옮겨 쓴 후 나의 감정은 가라앉고 세상의 소음에 잠이 깨듯 털고 일어난다.


서늘해지는 저녁 공기에 창문을 여미며 그래도 내일이 또 있음을 감사한다. 되돌아보면 먹물 한 점 찍어 되돌릴 수 있는 삶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그저 너무 먼 곳을 바라보지 않고 내일을 기다려 보는 게다. 그래도 궁금해지는 것은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대나.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들엔 호랑나비 떼 버들가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대나.” 파인 김동환 님의 시도 옮겨 써 본다.


무슨 일이든 만 시간을 공부하면 일가를 이룬다는데 나의 만 시간은 가능한 것일까? 아! 흘림궁체!


“그 사람은 나를 모르지만 내가 그 사람을 알기 때문입니다.”


중증 치매로 남편을 전혀 몰라보는 아내와, 매일 아침 밥을 같이 먹기 위해 이른 아침마다 양로원 길을 서두르는 남편의 답변이다. 여러 번 옮겨 썼다. 쓸 때마다 울컥하는 게 있다. 오늘도 눈물 한 방울을 낙관처럼 찍는다. 아픈 여인보다 잊힌 여인이 더 불쌍하단다. 하지만, 남편이 기억해 주는 그 여인의 이 가을은 불행하지만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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