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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편에서 삶의 터전이 더니든에서 오클랜드로 옮겨졌지만, 더니든에서의 홀로 살던 시간 중 빼놓기 아쉬운 부분들을 한데 모아 적어 본다.
내가 하던 일은 녹용 가공 공장의 관리직이었는데, 공장 운영이 연중 내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봄철 생녹용 구입 시기부터 가공 완료까지 약 5개월이 가장 바빴고, 나머지 기간은 한국이나 홍콩으로 수출하는 물량을 보내는 일 위주라 업무 시간이 길지 않았다.
자유 시간이 많아졌지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 근처에 방을 렌트하기보다 공장 안의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생활비를 절약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다 새 시즌이 돌아오면, 한국에서 오시는 사장님 일행이 머무는 모텔에 함께 거주하며 공장을 운영했기에 거주 비용을 크게 아낄 수 있었다.
공장 내부에 샤워실도 있고, 손님맞이용 작은 응접실 소파를 침대 삼아 침낭(Sleeping Bag)을 펴고 자니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당시 공장에는 일본제 전기밥솥이 있어 밥을 해 먹는 것은 괜찮았는데 반찬이 문제였다. 어쩌다 채소로 김치를 담그면, 냄새가 날까 봐 아무도 모르게 공장 보일러실 한편에 두었다.
공장 가동이 멈춘 시기라 내부 기온이 적당했고, 김치 익는 냄새도 환기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밖으로 빠져나가 큰 문제가 없었다.
가끔 농수산부 직원이 점검차 방문하곤 했지만, 비가동기에는 전체 확인 과정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산기에는 위생 검열 등 까다로운 검사가 이어져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으나, 쉬는 기간에는 그런 조사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국땅에서 만난 인연들
제2편에서 언급했듯, 남는 시간에 영어 학습을 하며 만난 학생들은 대부분 아시아계 친구들이었다.
자주 만나다 보니 마음이 통해 그들의 가정에 초대받아 식사를 대접받는 즐거운 시간도 있었다. 그중 폴란드에서 온 ‘루드밀라’ 가족이 기억에 남는다.
어떤 사연으로 뉴질랜드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정성 어린 식사를 대접받았다. 특히 그들 부부는 그림에 소질이 뛰어났다.
내가 간직하던 결혼 사진 중 한국 예복을 입고 시댁 식구에게 절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는 느낌이 좋았는지, 그 사진을 모델로 A4 용지에 삽화처럼 멋진 그림을 그려 선물해 주었다.
그들에겐 귀여운 어린 딸아이도 있었다.
당시 1983년은 폴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다.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가 이끄는 자유 노조(Solidarność)가 공산 정권에 맞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던 때였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국 방문이 있었던 1983년 6월은 세계 뉴스의 중심이었기에 나 또한 큰 관심을 두고 지켜보았다.
1980년대 초반의 이런 흐름은 결국 1989년 동유럽 공산권 붕괴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 폴란드 출신 가족이었기에 더욱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또한 11명의 태국 유학생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그때 익힌 태국 음식은 지금까지도 즐겨 주문해 먹을 정도다. 이들이 알려준 덕분에 오타고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3년 7월경 기숙사 독방을 배정받았다. 일반 렌트 비용보다 저렴한 데다 아침, 저녁 식사까지 제공되니 당시 월 수입으로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당시 내 나이 서른넷, 키위(뉴질랜드인) 학생들과 비교해도 연령대가 크게 차이 나 보이지 않았는지 나를 순수한 학생으로 대해주었다.
남녀 학생들과 대화할 기회가 아주 많지는 않았으나, 그때의 여러 추억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국인이 더니든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통일교 신자 가족도 있었다. 아내는 일본 여성이었지만, 교주인 문선명 목사의 조국 출신인 나를 무척 반갑게 맞아주어 당시 교민 세 가족이 서로 가깝게 왕래했다.
그들은 더니든 외곽 농촌에 살았는데, 가끔 우리 모두가 긴 여행 삼아 그곳을 방문하면 넓은 농장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곤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가족은 더니든 침례교 목사님 가족이다. 지금은 그분의 성함이 기억나지 않아 아쉽지만, 양녀의 이름은 ‘캐서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캐서린은 한국에서 입양된 딸이었는데, 그들 가족의 초대를 받아 만나게 되었다. 캐서린 위로 오빠 한 명, 아래로 남동생 한 명이 있는 다섯 식구였다.
이 목사님은 1950년 한국전쟁 참전 군인이셨다. 휴전 후 귀국하여 뉴질랜드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계셨다.
초대를 받은 후, 목사님의 교회가 더니든 항구 근처 내가 근무하던 공장에서 가까워 홀로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배 순서나 찬송이 서먹하여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지만, 두어 차례 발걸음을 했다.
지금도 그 때가 생각나 현재의 상황이 궁금해진 나머지, 구글로 교회를 찾아 현임 목사에게 이메일을 보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고 개인 신상 문제 때문인지 “잘 모른다”는 답장만 돌아와 아쉬움이 남았다.
택시 기사와 어린 소년의 기적 같은 재회
이제 가장 핵심이 되는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근무하던 공장의 한국 측 사장님을 통해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분은 나보다 7년 먼저 뉴질랜드에 오셔서 녹용 수입 관련 일을 하셨다.
때는 1975년경으로 추측된다. 사장님이 사업차 더니든의 한 모텔에 머물게 되었는데, 공항에서 모텔까지 태워다 준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이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더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기사가 슬쩍 물었다. “어디서 오셨나요?” “한국(Korea)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기사가 반색하며 말했다.
자기 동료 택시 기사 중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그 소리가 무척 반가워 꼭 한번 만나고 싶으니 찾아와 달라고 부탁을 남겼다.
그날 늦은 저녁, 소식을 들은 참전 용사 출신 택시 기사가 모텔로 찾아왔다. 서툰 영어와 몸짓으로 옛 회포를 풀던 중,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 기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내가 복무하던 부대 숙소 근처에서 내가 살갑게 도와주던 한국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귀국할 때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눈에 선해 눈물이 납니다.”
귀국한 사장님이 이 사연을 신문사에 알렸고, 기사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인 ‘어린아이’가 신문사를 찾아왔다.
기사 속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며 나타난 그를 보고 신문사는 사진을 찍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나 역시 나중에 뉴질랜드에서 이 사연을 듣고 나서야 과거 읽었던 비슷한 뉴스의 조각들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소식은 더니든의 택시 기사에게도 전해졌고, 결국 이듬해 그 기사는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헤어진 지 20여 년 만의 상봉이었다. 두 가족이 만나 서로를 껴안으며 얼마나 통곡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결론에는 기막힌 우연이 숨어 있다.
1950년대 초반, 마지막으로 헤어질 당시 그들은 군인과 어린아이였다.
20여 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 뉴질랜드로 돌아가 더니든에서 택시 운전사로 살아가던 참전 용사처럼, 한국의 그 소년 역시 성인이 되어 똑같은 ‘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각자 택시 운전대를 잡으며 서로를 그리워했던 그 기막힌 인연이 지금도 내 귀에 맴맴 도는 듯하다.
더니든을 떠나며 얽힌 이야기가 더 많지만, 이 감동적인 인연을 끝으로 제3편을 마친다.
떠나며 관계된 내용이 더 있음에도 이것으로 3편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