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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흔히 ‘축제의 달’로 불린다. 거리의 불빛은 화려하고, 사람들은 마치 잠시 현실을 잊은 듯 들뜬 기운을 뿜어낸다. 그러나 그 화려한 분위기 뒤에는 또 다른 현실이 자리한다. 바로 연말이 되면 더 깊어지는 우울, 스트레스, 충동성이다. 그리고 이 감정의 뒤편에는 조용히 번지는 또 하나의 위험, 도박이 있다. 도박은 단순한 오락이 아닐 때가 많다. 특히 정신적 부담이 누적되는 연말에는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둔갑해 위험한 양상을 띤다.
뉴질랜드의 정신건강 연구에 따르면, 감정적 스트레스가 극대화되는 시기는 도박 행동의 증가와 유의미하게 맞물린다. 아시안 커뮤니티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취약한 집단으로 꼽힌다. 가족 부양 압력, 학업•직장 성취에 대한 기대, 상대적으로 좁은 사회적 네트워크 등은 스트레스를 내면화하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감정 회피를 위한 행동—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온라인 베팅과 카지노 도박—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연말은 이러한 요인이 동시에 폭발하는 시기다.
연말 스트레스는 여러면에서 찾아온다. 첫째는 경제적 부담이다. 선물, 송금, 여행, 모임 준비 등 크고 작은 지출이 이어지면서 압박이 심해진다. 실제로 상담가들은 “금전적 압박을 느끼는 이들이 연말에 도박을 통해 ‘빠른 해결’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이번 한 번만’, ‘손실을 복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도박 문제의 전형적인 악순환을 촉발한다.
둘째는 정서적 고립감이다. 많은 아시안 이민자에게 연말은 가족애가 강조되는 시기이지만, 실제로는 물리적•정서적 거리감을 더 크게 느끼는 시기이기도 하다. 고국의 가족이 떠오르고, 외로움이 깊어진다. 커뮤니티 안에서도 연말이면 모임보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관계가 오히려 느슨해지는 경우가 많다. 외로움은 도박 플랫폼의 유혹에 취약해지는 대표적 요인이다.
셋째는 계절적 요인이다. 뉴질랜드는 남반구라 12월이 여름이지만, 날씨 변화가 심하고 일조량이 일정하지 않아 정서가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다. 규칙적 생활이 깨지고 수면 리듬이 흐트러지면 충동적 행동이 증가하는 것은 정신의학계에서 잘 알려진 현상이다. 도박은 이러한 충동성의 발현 중 하나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도박이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박은 종종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결합될 때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회피성행동이다. 감정적 고통을 잊기 위해 ‘즉각적 자극’을 찾게 되고, 그 중 가장 쉽고 바로 연결되는 것이 온라인 도박이다. 클릭 몇 번이면 시작할 수 있고, 새벽에도 운영되며, 주변의 시선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 특성은 특히 이민자와 유학생처럼 정서적 고립이 큰 집단에서 위험하다.
아시안 커뮤니티 연구에서는 도박 문제의 발생 배경에 공통된 요인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사회적 고립, 언어 장벽, 정신건강 낙인, 가족에 대한 책임감의 과도한 내면화 이 네 가지가 결합되면, 스트레스 해소의 건강한 통로는 좁아지고, 즉각적 자극에 기반한 문제적 행동이 늘어난다. 따라서 연말의 도박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이나 자제력 문제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구조적 환경, 문화적 요인, 멘탈헬스 문제가 결합된 복합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정신건강을 이야기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참아라”,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말이 정신건강 문제를 침묵하게 만들고, 그 침묵이 도박과 같은 위험 행동으로 확산된다. 감정의 어려움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임을 공동체가 인식해야 한다. 둘째, 문화•언어적으로 접근 가능한 상담 지원이 필수적이다. 한국어, 중국어, 힌디어 등 아시아 언어로 제공되는 전문 상담 서비스가 실제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민자들은 언어 장벽이 낮아질수록 도움 요청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지막으로, 커뮤니티의 연결 회복이 중요하다. 외로움은 도박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공동체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의 정서적 안부를 묻고, 작은 모임이라도 지속하는 것이 큰 보호 요인이 될 수 있다.
연말은 밝고 따뜻한 계절처럼 보이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위험한 감정의 계절이기도 하다. 도박과 멘탈헬스 문제는 그 중심에서 조용히 얽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미리 인식하고, 서로의 취약함을 이해하며, 공동체 전체가 함께 대응하는 것이다. 화려한 불빛이 모든 어둠을 지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서로를 지지하는 공동체는 그 어둠을 충분히 덜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