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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속의 침묵
루아페후 산은 뉴질랜드 북섬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다. 높고 험하며 사계절 내내 눈이 덮인 이 산은 항상 침묵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마오리 전설에 따르면, 루아페후는 오래전부터 말을 아끼는 산, 그리고 가장 오래된 지혜의 정령으로 여겨졌다.
# 정령들의 어른
통가리로, 나우루호에, 타라나키 같은 산들이 사랑과 분노로 충돌하며 전설을 남겼을 때, 루아페후는 언제나 가만히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존재였다.
그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아니라, 늘 곁에서 바라보며 자연의 질서와 정령들의 흐름을 읽는 조용한 안내자였다.
마오리 장로들은 말한다.
“루아페후는 신의 눈이다. 그는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아무 말 없이 세상을 이해한다.”
# 영혼을 이끄는 길
전설에 따르면, 방황하는 영혼이 땅에서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루아페후의 정상이다.
그 곳엔 인간의 언어는 없고, 눈과 바람, 얼음과 돌이 만든 영혼의 언어만이 흐른다.
루아페후는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일부 마오리 부족은 조상의 뼈를 루아페후 쪽을 향해 묻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 곳이 정령의 북극성이기 때문이다.
# 나만의 언어를 가진 산
통가리로가 전사라면, 루아페후는 철학자였다.
• 그는 눈으로 시간의 흐름을 측정했고,
• 바람의 방향으로 감정을 읽었으며,
• 얼음이 녹는 속도로 인간의 욕망을 보았다.
어느 해,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당신은 그렇게 고요한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상 부근의 화산호 위로 하얀 안개가 떠올랐고, 그 안개 속에는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숨어 있었다.
“말은 사라지지만, 침묵은 남는다.”
# 화산호의 눈물
루아페후 정상에는 Crater Lake(타푸포토 Lake, ‘신성한 호수’)가 있다. 그 호수는 늘 차가운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하에서 열이 올라오는 뜨겁고 깊은 물이다.
마오리 전설에선 이 호수가 루아페후의 눈물이라 한다. 산은 말은 하지 않지만, 그 슬픔은 호수로 흘러 하늘을 비추고, 방문자들의 마음을 흔든다.
# 지혜를 구하는 이에게
오래전, 한 젊은 마오리 전사가 삶의 방향을 잃고 루아페후를 찾았다. 그는 말없이 며칠을 산자락에 앉아 눈을 바라보고, 침묵을 들으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그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루아페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의 수 많은 말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진짜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그는 마을로 돌아가 장로가 되었고, 아이들에게 듣는 법, 기다리는 법, 말하지 않는 용기를 가르쳤다.
# 오늘날의 루아페후
지금도 루아페후 산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관광지이자, 스키와 등산, 사진 촬영의 명소다.
그러나 마오리 부족 Ngati Rangi와 Ngati Tuwharetoa에게 루아페후는 여전히 “마타우랑가(지혜)”의 정령이다. 그들은 말한다.
“산은 변하지 않았어. 다만, 우리가 귀 기울이지 않을 뿐이지.”
# 전설이 남긴 것
루아페후의 전설은 화려한 전쟁이나 사랑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고요함의 가치, 시간과 기억의 깊이, 그리고 말보다 더 큰 울림을 가진 침묵의 힘을 가르쳐 준다.
그 산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안의 혼란도 잠시 멈춘다. 왜냐하면, 루아페후는 지금도 묻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너 자신과 조용히 마주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