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토록 오만해졌을까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우리는 왜 이토록 오만해졌을까

0 개 1,120 명사칼럼

 ‘가난하되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되 교만함이 없다’(貧而無諂, 富而無驕).


‘논어’에서 제시된 이상적 인격의 형태다. 사실, 유교를 포함한 세계 모든 종교의 경전에는 오만함을 경계하는 문구가 들어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오만이라는 정서적 배경은 객관적인 현실 판단을 가로막고, 때로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승자’라고 판단한 사회가 오만함을 깨닫지 못해 궁극적으로 쇠락의 길로 간 사례는 세계사 속에 수두룩하다.


5875b58eaada52e0276008afd90c67eb_1694579242_5203.png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1990~2000년대 미국이 동구권의 몰락을 ‘역사의 종말’이라도 되는 양 미국식 의회주의 정치의 ‘최종적 승리’로 오판하고 발칸반도와 중동 등지에서 당시 미국 지도자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힘으로 강요하려고 한 것은 그 전형적 사례다. 이 오만한 오판의 대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의 불명예스러운 패주, 그리고 미 제국 쇠락의 본격화였다. 사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역시 이런 오만한 오판의 범주에 속하고 시진핑 시대 중국의 공격적 외교 역시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고금동서의 역사에서 제국들의 오만한 과욕은 늘 그 파멸의 문을 열어주곤 했고, 현재의 상황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중·러와 같은 제국이 아니다. 저들만큼 거대한 오만에 빠질 일이야 없을 것이다. 한데 지난 70여년 동안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문 여러가지 성공을 거둔 대한민국은 최근 역사와 현실에 관한 몇가지 극도로 자기중심주의적인 담론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 오만한 착각들이 결국 잘못된 현실 판단으로 이어져 나라를 그릇되게 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주된 걱정이다.


보통 한국 교과서나 언론들은 한국의 ‘기적’ 같은 산업화를 오로지 한국과 한국인의 성취인 것처럼 기술한다. 보수는 개발독재의 ‘성공’을 찬양하는 반면, 더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쪽은 죽도록 열심히 일해온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강조한다. 한데 고강도 장시간 노동은 사실 세계체제 주변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60~80년대 국가 주도 경제개발을 시도해보지 않은 주변부 국가는 거의 없었다.


그 시도가 유독 한국이나 대만 등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들에서 성공한 원인으로는 여러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냉전’이라는 맥락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북한 등 공산국가와 접한 ‘접경지대’에 있었던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나라 중 하나다. 1979년까지 받은 원조액은 146억달러에 이를 정도다. 거기에다 미국은 장기 저리 차관을 알선해주고 개발독재의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눈감아주고 선진국 시장·첨단기술에의 접근을 허용해줬다. 이와 같은 파격적 혜택의 대가는, 한국이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안보·외교적 종속이다. 단순화해 이야기하면, 대한민국은 ‘주권’을 양보한 대가로 상대적 ‘번영’을 산 거나 마찬가지다.


북한이 걸어온 궤적은 이와 달랐다. 소련은 미국만큼의 원조도, 미국과 같은 수준의 첨단기술 이전도, 미국과 비교할 만한 거대한 시장도 북한에 제공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북한은 중·소 갈등을 이용해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소련으로부터 벗어나 명실상부한 ‘완전한 주권’을 획득했다. 물론 이는 ‘배고픈 자주’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체제 핵심부로부터 그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었던 북한의 평균적 생활수준은, 이미 1970년대 중반 초고속 성장 중이던 한국에 추월당했다.


한데 북한의 역사 전체를 ‘실패작’인 것처럼 생각하는 많은 한국인의 오만한 의식과 달리, 북한의 근대화 프로젝트 또한 ―번영을 보장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포괄적이며 철저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은 핵물리학 전문가 집단과 그 집단을 재생산할 수 있는 고등교육 체계, 미사일 생산시설, 그리고 그 시설에서 사용할 정밀기계를 생산해낼 수 있는 공장 등 엄청난 규모의 기술·과학 인프라를 그 전제 조건으로 한다.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는 좋아할 일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인프라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는 사회는, 비록 가난하고 억압적이지만 나름대로 선진적이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오만하게도 북한을 ‘실패한 나라’로 보곤 하지만, 북한은 어떤 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선진국’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크나큰 자랑은 한류의 세계적 성공, 그리고 그 성공으로 인한 한국의 국제적 위상 상승이다. 해외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나로서는 물론 한류가 한국과 한국학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도 한국 대중문화 관련 강좌는 매년 수강생들을 가장 많이 모으는 교양과목 중 하나다. 최근 해외 한국학이 ‘주류’의 위치를 얻은 것은, 많은 면에서 한류의 힘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한데 케이(K)-드라마들을 전세계에 알린 넷플릭스의 경우를 보자. 넷플릭스가 지난 7년 동안 한국 작품에 1조5천억원이나 투자했다지만, 작품 제작비를 전액 지원하는 대신에 그 작품의 지식재산권을 독점하고 있다. 결국 ‘오징어게임’처럼 세계적으로 히트 친 작품도 대부분 수익은 넷플릭스가 가져간다. 사실, 넷플릭스와 같은 미국의 글로벌 플랫폼과의 관계에서 국내 제작자들은 하도급 업체에 불과하다. 즉, 한류가 아무리 인기 절정을 이룬다 해도 한류의 붐 역시 종속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성공에 대한 환호가 아닌, 교만하지 않은 겸손의 태도다. 우리의 성공이 컸던 만큼 그 성공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 역시 컸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이 성공과 불가결의 관계에 있는 대외종속 등 문제들을 어떻게 풀 것인지 냉정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아울러, 우리와 본질에서 다른 궤도를 따라온 북한과 같은 나라들이 ‘실패’했다는 오만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들의 현실을 객관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고, 그들이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우리를 더 우월한 존재로, 그리고 그들을 열등한 타자로 착각하여 그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거나 회피해서는 절대 안 된다. 독선과 오만, 국가적 나르시시즘의 끝에 쇠락과 파멸이 온다는 것을, 우리가 무엇보다 잘 기억해야 한다.


5875b58eaada52e0276008afd90c67eb_1694579317_1036.png 

■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박노자 “성공만 비추는 한국식 동포관, 숨은 고통과 차별 외면”

댓글 0 | 조회 681 | 4일전
▲ 노르웨이 오슬로대 인문학부 교수이자 귀화한 러시아계 한국인인 박노자(48) 교수2001년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인문학부 교수에게… 더보기

로렐라이의 선율과 제주 4·3

댓글 0 | 조회 168 | 2024.04.10
▲ 영화 ‘비정성시’ 포스터지난해 출간된 현기영 작가의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에는 제주 4·3 시절 산에 올라 투쟁에 나섰던 청년들이 부르던 노래가 소개된다. 이… 더보기

‘내 잘못’보다 ‘세상의 악’ 더 성찰해야 하는 사순절

댓글 0 | 조회 420 | 2024.03.13
지난 2월 14일 수요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은 날이면서, 교회성당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이다. 사순절, 즉 40일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죽음 이… 더보기

인맥 관리 ‘노하우’ 5가지 오해

댓글 0 | 조회 542 | 2024.02.27
“인사나 이권을 청탁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걸 보여주겠다.” 제17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노무현 당선자의 일성이다. 나는 이 말을 인수위원회 파견 근무할 때 직접 들었… 더보기

한국,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 사회?

댓글 0 | 조회 1,533 | 2024.02.14
저는 직업상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적 독립 운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투사들에 대한 자료를 읽다 보면 이 분들이 정말 “초인”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더보기

관료주의의 무능, 권력자의 광기, 그리고 인간의 존엄 - <서울의 봄>이 상기시키…

댓글 0 | 조회 327 | 2024.01.31
공허한 권력의 실체이 영화 후반부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로 시작하고 싶다. 반란 성공이 확실해지고 수괴 전두광 장군(황정민)은 일행과 함께 본부로 돌아가려다 혼자… 더보기

사람 마음을 얻으려면

댓글 0 | 조회 567 | 2024.01.17
공통년 392년 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성당 출입을 금지당한 사건이 생겼다. 390년 그리스 테살로니카에서 주민 폭동이 일어났고, 황제는 군대를 보내 주민 … 더보기

한해를 되비추는 예술의 힘

댓글 0 | 조회 389 | 2023.12.22
▲ 영화 ‘괴물’. 미디어캐슬 제공12월의 첫 주말, 저녁 산책을 하며 한해를 되돌아보니 무엇보다 대립과 증오로 넘친 1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지구촌 두곳… 더보기

선한 마음 사이로도 차별이 샐 수 있다

댓글 0 | 조회 446 | 2023.12.13
▲ 단편 영화 ‘빠마’의 한 장면으로 방글라데시에서 농촌으로 시집 온 니샤의 일상을 통해 우리 농촌에 사는 이주여성에게 부과된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한글교실에서… 더보기

‘전쟁의 해’ 2023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댓글 0 | 조회 433 | 2023.11.29
▲ 지난 5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상공에서 이스라엘군이 쏜 조명탄이 빛나고 있다. AFP 연합뉴스2023년이 이제 저물어간다. 2023년은 깊어져 가는… 더보기

깊은 슬픔이 흐르는 강

댓글 0 | 조회 344 | 2023.11.15
▲ 경남 합천 황강. 사진 합천군청 누리집사람의 정성이 나무와 쇠를 감동시킨 곳영남지방 낙동강의 지류 가운데 경남에서 가장 긴 강은 남강과 황강이다. 남강은 진주… 더보기

한글날에 생각하는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댓글 0 | 조회 392 | 2023.10.25
오늘은 한글날이다.솔직하게 말해,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산 적이 별로 없다. 해외에 나가 공부를 하거나 여행을 할 때, 한국역사와 문… 더보기

사회적 타살의 일상성

댓글 0 | 조회 527 | 2023.10.11
현실 사회주의를 비판하려는 이들이 늘 집중 공격하는 것은 농업 집단화나 숙청 때와 같은 대규모 국가폭력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 스탈린주의를 변호할 수는 없다. 혁… 더보기

​제7회 이호철 통일로문학상 수상소감 - 메도무라 슌

댓글 0 | 조회 396 | 2023.09.27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을 제게 수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정위원을 비롯한 문학상 관계자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제 소설이… 더보기
Now

현재 우리는 왜 이토록 오만해졌을까

댓글 0 | 조회 1,121 | 2023.09.13
‘가난하되 아첨함이 없고, 부유하되 교만함이 없다’(貧而無諂, 富而無驕).‘논어’에서 제시된 이상적 인격의 형태다. 사실, 유교를 포함한 세계 모든 종교의 경전에… 더보기

한반도, 단호한 냉정이 필요하다

댓글 0 | 조회 693 | 2023.08.22
올해는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53년 7월27일, 북한 인민군과 유엔군은 상호 교전을 잠시 멈추고 더 이상의 후속조치를 멈추어버렸고 그 뒤로 … 더보기

내가 여전히 잘 모르고 있는 일본인, 일본 역사

댓글 0 | 조회 941 | 2023.08.09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토기를 만든 나라. 토기를 처음으로 발명한 것은 일본인이다. 그들은 빙하기가 끝나자 곧 토기를 사용했다. 조몬(繩文) 토기가 그것으로 규슈… 더보기

남명 조식

댓글 0 | 조회 584 | 2023.07.25
남명 조식은 세 차례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사례의 인사를 올리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그동안 자신이 왜, 벼슬을 마다하였는… 더보기

국제 체제, 균세 (balance of power)로의 귀환?

댓글 0 | 조회 839 | 2023.07.12
애당초 국제 체제는 균세 (均勢)를 중점적 개념으로 해서 작동돼 왔습니다. 슈메르에서 여러 도시 국가들이 상호 각축하면서 나름의 ‘세력 균형’을 이루었던 시대부터… 더보기

한류, 또 하나의 착취공장인가

댓글 0 | 조회 953 | 2023.06.28
요즘 내가 여태까지 거의 하지 않았던 일을 하나 하게 됐다. 한국 대중문화 수업을 하게 되면서 특히 노르웨이에서 한국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자주 만나 이… 더보기

조지 오웰을 찾아 - 나는 왜 쓰는가

댓글 0 | 조회 584 | 2023.06.14
나는 지난 5-6년간 많은 글을 써 왔다. 전공인 인권법 관련 글은 물론 그것을 넘어 다양한 내용의 대중적인 글을 썼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전공 관련 글은 의무… 더보기

대통령은 ‘대통령의 말’을 해야 한다

댓글 0 | 조회 1,638 | 2023.05.24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지난 일본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은 윤 대통령의 방미를 가슴 졸이며 지켜봤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더보기

한국의 국제적 역할?

댓글 0 | 조회 953 | 2023.05.10
분단 국가란 애당초부터 상당한 “세계성”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적 냉전의 양 진영에 의해서 한반도가 분단되어 두 개의 국가가 생긴 이상, 양쪽 국가… 더보기

전라좌수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이 되기까지

댓글 0 | 조회 758 | 2023.04.26
선조 25년(1592) 2월, 원균은 경상 우수사에 부임하였다.이순신과 원균은 인연이 깊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들은 조선의 무관으로서 함경도에서 여진족… 더보기

“사비로 천도했다”는 문장에서 학생들이 헤매고 있어요

댓글 0 | 조회 846 | 2023.04.11
■ 서 부원오늘도 역사 수업을 하다가 교실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게 된다. 강의에 대한 이해는커녕 교과서에 나오는 기본적인 단어의 뜻조차 모르는 아이가 많아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