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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지루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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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인재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식별할 수 있기를 누구나 기대했다. 그러나 세종 초년에는 과거제도 역시 본래의 목적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7일, 대제학 변계량은 그 시대가 직면한 어려움을 두어 줄로 요약하였다.


“문과 1차 시험(초장)에서 강경(경서마다 한 장씩 지목하여 외우고 풀이하게 함)을 하도록 법을 바꾼 결과, 쓸만한 인재는 모두 무과 시험장으로 달아났습니다.”


선비들은 경전 공부를 무척 싫어했던 모양이다. 문과 응시자가 계속 줄어들자 좌의정 박은이 대책을 세웠다.


“앞으로는 무과도 <<사서>>를 통달한 사람만 응시하게 규정을 바꿔야 합니다.”


궁여지책이었으나 왕은 그 제안을 수용했다. (세종 1년 2월 16일) 그런데 사태는 막연히 짐작하였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세종은 성균관의 운영실태를 점검하고는 깜짝 놀랐다. 성균관에 나와서 착실히 문과시험을 준비하는 유생은 정원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왕은 의정부와 육조와 상의하여 대책마련에 고심했다(세종 즉위년 1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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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성균관의 재정부터 개선하기로 결심하고, 왕은 노비 100명을 하사하였다(세종 1년 8월 8일). 또,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왕은 기회가 될 때마다 성균관의 학관과 유생에게 술과 어육(생선 및 고기)을 듬뿍 선물했다(세종 9년 11월 13일 등). <<사서>>와 <<오경>> 등 학습에 필요한 서적을 성균관과 오부 학당에 나누어준 것은 물론이었다(세종 5년 3월 15일 등).


이와는 별도로 성균관의 위생 수준을 높이는데도 정성을 쏟았다. 유생이 부종병에 걸려 사망하자 왕은 의원 2명을 성균관에 고정 배치하였다. 의원들은 성균관에 머물며 유생들의 건강을 돌보았다(세종 3년 8월 24일). 그리고 공조에 명하여 성균관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각각 5칸의 온돌도 깔았다. 아울러 선공감에 지시하여 목욕탕도 새로 짓고 유생들이 공부할 걸상(판등)도 80개나 만들었다(세종 7년 7월 19일).


이처럼 다방면에 걸쳐 큰 노력이 거듭되었으나, 성균관의 운영은 정상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종의 번민이 깊어졌다. 그때 우사간 박관이 개선책을 제시했다.


“40세 미만의 생원들을 학당과 향교에서 가르치는 직임에 절대 임명하지 마소서. 그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쉽게 벼슬길에 나가는 길을 막으소서!”


왕은 그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했다(세종 5년(1423) 11월 9일). 그러자 성균관에 기숙하는 유생들이 늘어났다. 적절한 정책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시일이 흐르자 성균관을 학문의 요람으로 만들려는 왕의 결심에 감동한 관리도 나왔다. 성균관 주부 송을개는 새로 학칙 시안을 만들어 왕의 면학(勉學, 학문에 힘씀) 정책에 호응하였다. 그의 제안에는 특이한 점도 있었다. 학교마다 <선부(善簿)>와 <벌부(罰簿)>라는 두개의 장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씨향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효성있고, 우애하고, 친척들과 화목하며,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돕는 유생을 비롯해 명망이 있는 사람은 모두 <선부>에 기록하자고 제안했다. 반면에 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행위만 하는 이들은 모두 <벌부>에 적자고 말했다. 연말이 되면 학교는 2권의 장부를 각 도의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다시 이조와 예조에도 알리자는 것이었다. 이조는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그 기록을 참조하고, 예조는 과거시험 때마다 행실이 나쁜 사람에게는 응시기회를 주지 말자는 의도였다. 



세종은 송을개의 제안에 깊이 공감했고, 의정부에 타당성 검토를 의뢰하였다. 얼마 후 나라에서는 전국의 모든 학교에 명령하여, <선부>와 <벌부>를 작성하라고 하였다. (세종 19년 7월 10일) 하지만 영원 한 것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선부>와 <벌부>는 조선의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공정한 평가는 세종 때에도 어려운 일이었다. 훗날 중종 때 <<향약>>이 전국에 널리 시행되면서 <선악적(善惡籍)>이 다시 등장하였다. 주민의 선행과 악행을 기록해 두었다가 ‘신상필벌’을 하겠다는 뜻이었는데, 그 역시 오래 가지 못하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데는 항상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다.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많아도, 그게 과연 제대로 비운 것인지를 알 수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세상을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두르라며 검찰의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 다함) 권력을 키운 셈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얼마나 깨끗해졌나. 검찰이야말로 비리의 온상은 아닌가. 제가 하면 무엇이든 다 옳고 남이 하면 다 글렀다! 이런 말도 안되는 사고 방식이 오늘날 대한민국 검찰의 참 모습은 아닐까. 세상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과거제도도 만들었고, 상주고 벌주는 제도, 범죄 사실을 수사하는 기관도 만들었으나, 참으로 지루하고 비루하고 지겨운 역사가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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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승종

한국학, 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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