굄대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굄대

0 개 621 수필기행

■ 최 현숙 


군불 지핀 방안이 후끈하다. 퀴퀴한 냄새가 훈기를 더하는 아랫목에 두레상이 놓여 있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장김치와 청국장. 농사철이면 동동걸음을 쳐도 겨울이면 여유로운 그이 덕에 나는 가끔 이런 호사를 한다.


빈 그릇만 남은 밥상에 기분이 좋았던가. 상을 물리던 그이가 새해에도 된장 맛이 좋을 거라며 윗목에 자리 잡은 메주를 가리켰다. 그 손길을 따르던 내 눈이 어느 순간 놀라움으로 멈췄다. 곰팡이가 꽃처럼 피어있는 메주를 달고 선 긴 나무틀, 그것을 기울지 않게 받치고 있는 것은 거듭 보아도 글 친구 넷이서 쓴 우리 수필집이었다. 놀란 마음을 숨기며 시선을 돌려봐도 속에서는 쿵쿵 천둥소리가 났다.


그이와는 농장이웃으로 만났다. 농사초보인 우리는 알짜농부인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농장도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고 서로를 추어가며 십여 년을 가까이 지냈다. 농사 외에는 딴전 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을 준 것은 그들 부부 얘기가 거기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갈 때마다 책에 눈이 갔고 볼 때마다 좋았다. 두툼한 족보 몇 권이 전부인 키 낮은 책꽂이에서 우리 책은 겨울옷만 입던 사람이 새로 산 봄옷을 걸친 듯 화사해보였다. 그렇게 폼 나는 자태로 기쁨을 주던 책이 엉뚱한 곳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슬며시 책꽂이를 훔쳐보았다.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잠깐 서운했지만 화나지는 않았다. 원망의 마음도 없었다. 책을 의식했다면 밥 먹자 부르지도 않았을 무구한 사람 아닌가. 어쩌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그랬다면 책 주인에게 미안할 까닭도 없이 메주 틀의 균형을 잡아줄 맞춤한 책이 그저 반가웠을 것이다. 아침저녁 군불 지필 때 불쏘시개로 재가 되었다 해도 몰랐을 일이다. 뜨거운 냄비를 받치다가 태워버렸다 한들 알았겠는가. 몇 해가 지난 책을 보관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며 놀란 속을 가라앉혔다.


오래전 어느 강좌에서였다. 강사인 시인이 자신의 책이 냄비받침으로라도 쓰였으면 좋겠다는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 그 말은 공감하는 쪽과 분개하는 부류로 나뉘었는데 나는 분노하는 의견에 화를 보탰다. 그런데 배달되어 오는 책을 포장지도 뜯지 않고 쟁여놓는다는 작가들의 고충을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인들 읽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무엇으로든 쓰인다는 것은 관심 밖에서 정물로 놓여 있던 책이 새로 생명을 찾는 일이 아닐까. 잊히는 것보다는 요긴하게 사용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 책이 그러기를 바란 적도 없다. 그러니 책이 새로운 일자리를 얻은 것에 서운해 할 일은 아니다. 거기에 새로 맡은 일의 무게가 어디 냄비받침에 비할 것인가. 한 끼 찌개 냄비를 받치는 일이 한 해 식탁을 책임지는 메주의 위상을 넘볼 수는 없는 일이다. 작은 몸피로 큰일을 감당하는 야무진 자태에 서운하던 마음도, 짧은 순간 널뛰듯 오르내린 유치한 속내도 차츰 누그러졌다. 읽히는 책과 받침대가 되어주는 책, 어느 쪽이든 누군가의 삶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다. 책장이나 책상 위 방바닥에까지 널려있었다. 그것은 익숙한 풍경이었을 뿐 딱히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우리 집에 오는 책들은 가엾기도 하지.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할머니는 펼치지 않은 책들을 볼 때마다 넋두리 하셨다. 그러나 책에 묻혀 살지는 않았다 해도 그 언저리에서 자라온 덕에 여러 형제가 작으나마 제 몫을 하고 사는 게 아닐까. 할머니 눈에 들 만큼은 아니었어도 그것이 마음의 틀을 잡아준 굄대였다는 걸 이제 알겠다. 메주 틀을 받쳐 장맛을 달게 할 우리 책처럼.


그이는 해마다 메주를 쑨다. 내년에도 훈훈한 방에 메주를 띄우고 기분 좋은 날 전화를 걸어올 게다. 그때도 메주 틀을 받치고 있는 우리 책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도 누군가에게 굄대가 되어보렴. 큰 무게에 눌려 있는 책이 은근히 부추기는 것 같다.


■ 최 현숙 


750498fc9d63d35baa05e147722a9c8f_1663106825_6429.jpg
 

바람의 말

댓글 0 | 조회 590 | 2023.05.23
누가 왔었나?마당이 어수선하다. 담벼락으로 기어오르던 호박은 넝쿨째 떨어져 뒹굴고 텃밭 고추는 밭고랑에 드러누웠다. 휘어지게 열매를 키우던 자두나무 큰 가지도 꺾… 더보기

제 2의 나

댓글 0 | 조회 583 | 2023.01.18
두 손을 펴서 활짝 벙글어지는 꽃잎 모양을 만든다. 손톱마다 살구꽃 배꽃이 하늘거리고 푸른 냇물도 흐른다. 손톱에 꼼꼼히 그림 그리는 게 참 즐겁다. 류마티스 관… 더보기
Now

현재 굄대

댓글 0 | 조회 622 | 2022.09.14
■ 최 현숙군불 지핀 방안이 후끈하다. 퀴퀴한 냄새가 훈기를 더하는 아랫목에 두레상이 놓여 있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장김치와 청국장. 농사철이면 동동걸음을 쳐도… 더보기

행복한 고구마

댓글 0 | 조회 811 | 2022.07.12
내가 강릉영림서 진부관리소 말단 직원일 때 월급이 칠천 몇 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어린 애 둘과 아내와 내가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았다. 어떤 때는 아내가 담배를… 더보기

꽃보다 할매

댓글 0 | 조회 978 | 2022.05.24
천지가 꽃으로 들썩입니다. 호들갑으로 들었던 꽃 멀미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날들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 강변에 오늘은 색다… 더보기

그리움

댓글 0 | 조회 902 | 2022.04.27
■ 최 민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 더보기

첫사랑

댓글 0 | 조회 1,083 | 2022.03.09
■ 노 혜숙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덤불숲에 던졌다. 딸그락, 빈 도시락에서 수저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가슴이 콩닥거… 더보기

내가 방랑자로 떠돌 때

댓글 0 | 조회 936 | 2022.02.22
■ 장 기오젊었을 때 나는 장돌뱅이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한 달에 20일 이상을 보따리를 싸들고 이 도시, 저 항구로 배회했다. 내가 그렇게 떠돌면서 느낀 절경(… 더보기

명태에 관한 추억

댓글 0 | 조회 782 | 2022.02.09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의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의 모습은 ‘천생… 더보기

바둑이

댓글 0 | 조회 990 | 2022.01.27
■ 최 현숙내 방 벽에는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이사를 해도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맞추는 사십 년 지기 룸메이트다. 검정 바탕에 배와 목덜미로 하얀 털빛이 조화… 더보기

누비처네

댓글 0 | 조회 770 | 2022.01.11
■ 목 성균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 더보기

낙타 이야기

댓글 0 | 조회 846 | 2021.12.22
■ 최 민자까진 무릎에 갈라진 구두를 신고, 털가죽이 벗겨진 엉덩이로 고고하게 걸어가는, ‘머리는 말 같고 눈은 양 같고 꼬리는 소 같고 걸음걸이는 학 같은’ 동… 더보기

동생을 업고

댓글 0 | 조회 1,170 | 2021.12.08
■ 정 성화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더보기

먼길

댓글 0 | 조회 934 | 2021.11.23
■ 노 혜숙나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지극히 내성적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감성이 넘쳤다. 밴댕이처럼 좁은 속은 … 더보기

겨울 편지

댓글 0 | 조회 1,041 | 2021.11.10
​■ 반 숙자방금 우체부가 다녀 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우편물에 우체부는 영문 모를 의아한 눈길을 보낸다. 오늘로서 편지는 65통을 채웠다. 9월, 10월 두 … 더보기

그대 뒷모습

댓글 0 | 조회 915 | 2021.10.27
■ 반 숙자서녘 하늘에 별이 돋는다. 마음이 잔잔해야 보이는 초저녁별, 실눈을 뜨고 별 속에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아본다.지난겨울에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눈이… 더보기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

댓글 0 | 조회 968 | 2021.10.12
■ 장 기오요즘도 나는 수시로 발 앞꿈치의 굳은살을 면도날로 베어 낸다.이렇게 안 하면 발바닥이 아프다.함께 일하는 연출진이라고는 달랑 연출, 조연출 둘 뿐이었던… 더보기

『유년 기행』 자전거

댓글 0 | 조회 777 | 2021.08.24
여느 때처럼 맴생이 두 마리를 끌고 들로 나왔다. 얼마 전 아버지가 암컷 맴생이 한 마리를 사와 맴생이 친구가 하나 더 늘었다. 산과 들이 기지개를 펴고 응달 진… 더보기

돼지불알

댓글 0 | 조회 1,460 | 2021.08.11
■ 목 성균상달 저녁 때, 사랑에 군불을 지피고 앉아서 쇠죽솥의 여물 익는 냄새를 맞으면 잔잔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마른 장작이 거침없이 불타는 평화로… 더보기

콩 심은데 콩 나고

댓글 0 | 조회 984 | 2021.07.28
■ 반 숙자미명(未明)이다. 가만히 뜨락을 내려 밭으로 나선다. 우리집 과수원은 뽀얀 안개 숲을 헤엄쳐 나오느라 수런수런하고 있다. 가슴을 펴고 폐부 깊숙이 싱그… 더보기

유년 기행

댓글 0 | 조회 806 | 2021.06.22
■ 이 한옥동녘이 열푸름히 열리고 희끗희끗한 서리가 엷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 새를 쫓으러 논으로 향했다. 추수를 앞둔 즈음의 새쫓기는 내가 맡은 임무였다. 옷… 더보기

말하고 싶은 눈

댓글 0 | 조회 911 | 2021.06.10
■ 반 숙자우리 집 파수꾼 미세스 짜루는 해마다 한 번씩 출산(出産)을 한다. 정월 대보름쯤이면 휘영청 찬 달빛 아래 연인을 찾아온 미스터 견(犬)공들이 여기저기… 더보기

소풍

댓글 0 | 조회 829 | 2021.05.25
■ 이 한옥소풍 가는 날은 기분이 붕붕 떴다. 다른 날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나설 차비를 했다. 어머니는 벌써 하얀 쌀밥 도시락을 준비했다. 멸치볶음, 콩자반, … 더보기

사진첩

댓글 0 | 조회 1,052 | 2021.05.12
■ 최 현숙‘똑똑, 택배입니다.’아들이 보냈군요. 큼지막한 두 개의 상자가 사진첩으로 빼곡하네요. 웬만한 것은 버린다더니 추억까지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요. … 더보기

가을 탓인가?

댓글 0 | 조회 972 | 2021.04.29
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투명했다.태풍 ‘산바’가 지나간 며칠 후부터 그랬다.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이 산허리를 감아 피어오르고 나무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마당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