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업고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동생을 업고

0 개 1,169 수필기행

■ 정 성화


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앞코가 둥그스름한 까만 고무신이 소녀가 입고 있는 무명치마와 어우러져 더욱 소박한 모습이다. 소녀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생을 연이어 낳아주셨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의 동생은 넷으로 불어났다. 동생이 자꾸 생긴다는 것은 한창 놀고 싶어 하는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니다. 나가 놀 수 있는 자유가 이분의 일에서 사분의 일로, 다시 팔분의 일로 줄어든다는 의미다.

 

우리 집은 아기를 길러내는 협동조합이었다. 언니는 어머니와 함께 기저귀 빨래를 했으며, 나는 아기가 목을 가눌 수 있을 때부터 아기를 업어 재우는 일을, 내 아랫동생은 기저귀를 개는 일이나 방청소를 도왔다. 아기도 어른처럼 가만히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잠이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꼭 등에 업혀서 바깥나들이를 저하고 싶은 만큼 한 다음에야 동생은 잠이 들었다.

 

업힌 자세를 투시도로 그리면 거의 앉은 자세에 가깝다. 그런데도 방바닥에 눕기보다 굳이 등에 업히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어른이 되면 아무리 잠이 온다 해도 눕지 못하고 앉은 채로 선잠을 자야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아기가 미리 알고서 일찌감치 연습을 해 두려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등에는 방바닥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아기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등 너머로 전해져오는 숨결과 체온에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의 편안함을 다시 느껴보려는 것은 아닐까.


동생을 업고 집을 나서면 갈 데가 별로 없었다. 동생의 잠을 탁발(托鉢)하러 나서는 그 일이 나에게는 꽤 힘들게 느껴졌다. 집 주위를 빙빙 돌다가 골목에 피어있는 분꽃의 개수를 헤아려보기도 하고, 옆집 옥상에 널린 빨래가 몇 개인지 세어볼 때도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우리 집 골목의 정적을 더욱 깊게 하고 있었다.

 

좀 너른 공터로 나오면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니… ”


노래를 부르며 나풀나풀 고무줄을 넘거나, 바닥에 석필로 하얀 금을 그어놓고 사방차기(돌차기)를 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시원한 그늘에 모여 앉아 공기놀이나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동생을 재우는 것보다, 뛰어 놀고 싶은 내 마음을 재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내게 있어 ‘자유’란 등에 아무것도 업지 않은 홀가분함을 의미했고, 그 때 만큼 자유가 부럽고 빛나 보인 적도 없었다.

 

친구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등에 업힌 동생이 이내 포대기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한 자리에 오래 서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언젠가 고무줄놀이를 너무 하고 싶어서, 옆에 있던 빈 사과상자에다 어린 동생을 담아놓고 아이들이랑 고무줄놀이를 했다가, 누군가 어머니에게 일러주는 바람에 단단히 혼이 난 적도 있다.

 

동생을 업어 재우는 것 못지않게 잠든 동생을 내려놓는 것도 힘들었다. 잠이 깊게 들었다 싶어서 집에 돌아와 동생을 방바닥에 살포시 내려놓는 순간,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팔팔하게 되살아나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A/S(After service)는 전자 제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다시 동생을 업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 때, 지나가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이고, 덩치도 작은 게 제 동생을 잘도 업어주네” 라고 했을 때, 공연히 서러움이 북받쳐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도 있다.

 

먼 데 산을 보면, 산이 산을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의 등 뒤에 납작이 엎드린 산은 살풋 잠이 들었는지 아슴해 보인다. 산등성이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림 속 아기 보는 소녀의 어깨선 또한 부드러운 산의 능선을 닮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소녀는 모든 생명체를 넉넉히 품어내는 산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동생을 업고 있으면 동생의 살 냄새, 새근거리는 숨소리, 동생의 꼼지락거림, 그리고 통통한 두 다리의 감촉 등, 그 모든 것이 나의 등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등에 느껴지는 체온이 여느 날 같지 않다거나 심하게 보챈다 싶으면, 대개 그 뒷날 병원에 데려갈 일이 생겼다. 바로 밑의 동생을 빼고는 다들 내 등 뒤에서 옹알이를 연습했고, 내 등에 오줌을 싸기도 했으며, 잠투정을 하느라고 내 뒷머리 가락을 쥐어뜯으면서 손아귀의 힘이 세어져 갔다. 막냇동생이 저 혼자 잘 걷게 되어 더 이상 업히지 않으려고 내 등을 밀쳐내었을 때, 나는 웬일인지 해방의 기쁨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동생을 업었을 때의 느낌은 나의 등에 그대로 내장(內藏)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아이를 낳아 처음으로 등에 업었을 때, 그 느낌은 한결 증폭되어서 내게 되돌아왔다. 아이의 숨과 나의 숨이 포개지면서 살과 살이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딜 가든지 내 아이를 업고 다녔었다.

 

서양에는 우리와는 달리 업고 업히는 문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외국의 전쟁영화를 보면, 부상자라 해도 업어 나르는 게 아니라 들것에 싣던가 아니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질질 끌고 가는 수가 많다. 업는다는 것은 한 생명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내가 감당하겠다는 의미이며, 한 사람의 걸음으로 둘이 나아가겠다는 뜻이다. 부모가 아이를 업어주고, 형이 아우를 업어주고, 다 큰 자식이 노모를 업는 풍습은 우리 문화에 있어 하나의 아름다운 결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그냥 업어주는 게 아니라고 한다.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고서 높은 곳으로 올라간 뒤 사정없이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한다. 그러면 새끼는 살기 위해 날개를 너풀거리게 되고,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땅에 닿기 전 아래로 내려와서는 다시 업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어미의 등줄기에 엎드려 어미의 가뿐 숨결을 느낄 때, 새끼 독수리는 더 힘찬 날갯짓을 다짐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날개에 이젠 제법 힘이 올라 나의 등을 찾지 않게 되면서, 나는 자꾸만 등 언저리가 허전해져 왔다. 등이 먼저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듯 했다. 그 때 누군가 내게 문학을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겨오는 지금의 자유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가슴이 속삭였을 때, 뒤쪽의 등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 했다. 문학이란 등짐을 질 때는 스스로 그만한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등은 내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 한 편을 업고 대열에 끼여서 가고 있다. 지금 업고 있는 이 글을 푹 재울 수 있을지, 그리고 방바닥에 제대로 내려놓을 수 있을지 잔뜩 걱정을 하면서.


■ 정 성화 


d2bf965eb8d7abba9d035d3a489c570c_1639006561_8471.jpg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풍로초’)로 당선,

2013년 서정시학 선정 ‘2013년 한국의좋은수필’에 선정, 수필 ‘동생을 업고’와 ‘크레파스가 있었다’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현대수필문학상’, ‘정과정문학상’, ‘윤오영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바람의 말

댓글 0 | 조회 590 | 2023.05.23
누가 왔었나?마당이 어수선하다. 담벼락으로 기어오르던 호박은 넝쿨째 떨어져 뒹굴고 텃밭 고추는 밭고랑에 드러누웠다. 휘어지게 열매를 키우던 자두나무 큰 가지도 꺾… 더보기

제 2의 나

댓글 0 | 조회 583 | 2023.01.18
두 손을 펴서 활짝 벙글어지는 꽃잎 모양을 만든다. 손톱마다 살구꽃 배꽃이 하늘거리고 푸른 냇물도 흐른다. 손톱에 꼼꼼히 그림 그리는 게 참 즐겁다. 류마티스 관… 더보기

굄대

댓글 0 | 조회 621 | 2022.09.14
■ 최 현숙군불 지핀 방안이 후끈하다. 퀴퀴한 냄새가 훈기를 더하는 아랫목에 두레상이 놓여 있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장김치와 청국장. 농사철이면 동동걸음을 쳐도… 더보기

행복한 고구마

댓글 0 | 조회 810 | 2022.07.12
내가 강릉영림서 진부관리소 말단 직원일 때 월급이 칠천 몇 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어린 애 둘과 아내와 내가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았다. 어떤 때는 아내가 담배를… 더보기

꽃보다 할매

댓글 0 | 조회 977 | 2022.05.24
천지가 꽃으로 들썩입니다. 호들갑으로 들었던 꽃 멀미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날들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 강변에 오늘은 색다… 더보기

그리움

댓글 0 | 조회 902 | 2022.04.27
■ 최 민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 더보기

첫사랑

댓글 0 | 조회 1,083 | 2022.03.09
■ 노 혜숙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덤불숲에 던졌다. 딸그락, 빈 도시락에서 수저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가슴이 콩닥거… 더보기

내가 방랑자로 떠돌 때

댓글 0 | 조회 936 | 2022.02.22
■ 장 기오젊었을 때 나는 장돌뱅이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한 달에 20일 이상을 보따리를 싸들고 이 도시, 저 항구로 배회했다. 내가 그렇게 떠돌면서 느낀 절경(… 더보기

명태에 관한 추억

댓글 0 | 조회 781 | 2022.02.09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의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의 모습은 ‘천생… 더보기

바둑이

댓글 0 | 조회 989 | 2022.01.27
■ 최 현숙내 방 벽에는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이사를 해도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맞추는 사십 년 지기 룸메이트다. 검정 바탕에 배와 목덜미로 하얀 털빛이 조화… 더보기

누비처네

댓글 0 | 조회 769 | 2022.01.11
■ 목 성균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 더보기

낙타 이야기

댓글 0 | 조회 844 | 2021.12.22
■ 최 민자까진 무릎에 갈라진 구두를 신고, 털가죽이 벗겨진 엉덩이로 고고하게 걸어가는, ‘머리는 말 같고 눈은 양 같고 꼬리는 소 같고 걸음걸이는 학 같은’ 동… 더보기
Now

현재 동생을 업고

댓글 0 | 조회 1,170 | 2021.12.08
■ 정 성화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더보기

먼길

댓글 0 | 조회 934 | 2021.11.23
■ 노 혜숙나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지극히 내성적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감성이 넘쳤다. 밴댕이처럼 좁은 속은 … 더보기

겨울 편지

댓글 0 | 조회 1,041 | 2021.11.10
​■ 반 숙자방금 우체부가 다녀 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우편물에 우체부는 영문 모를 의아한 눈길을 보낸다. 오늘로서 편지는 65통을 채웠다. 9월, 10월 두 … 더보기

그대 뒷모습

댓글 0 | 조회 915 | 2021.10.27
■ 반 숙자서녘 하늘에 별이 돋는다. 마음이 잔잔해야 보이는 초저녁별, 실눈을 뜨고 별 속에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아본다.지난겨울에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눈이… 더보기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

댓글 0 | 조회 968 | 2021.10.12
■ 장 기오요즘도 나는 수시로 발 앞꿈치의 굳은살을 면도날로 베어 낸다.이렇게 안 하면 발바닥이 아프다.함께 일하는 연출진이라고는 달랑 연출, 조연출 둘 뿐이었던… 더보기

『유년 기행』 자전거

댓글 0 | 조회 777 | 2021.08.24
여느 때처럼 맴생이 두 마리를 끌고 들로 나왔다. 얼마 전 아버지가 암컷 맴생이 한 마리를 사와 맴생이 친구가 하나 더 늘었다. 산과 들이 기지개를 펴고 응달 진… 더보기

돼지불알

댓글 0 | 조회 1,460 | 2021.08.11
■ 목 성균상달 저녁 때, 사랑에 군불을 지피고 앉아서 쇠죽솥의 여물 익는 냄새를 맞으면 잔잔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마른 장작이 거침없이 불타는 평화로… 더보기

콩 심은데 콩 나고

댓글 0 | 조회 984 | 2021.07.28
■ 반 숙자미명(未明)이다. 가만히 뜨락을 내려 밭으로 나선다. 우리집 과수원은 뽀얀 안개 숲을 헤엄쳐 나오느라 수런수런하고 있다. 가슴을 펴고 폐부 깊숙이 싱그… 더보기

유년 기행

댓글 0 | 조회 805 | 2021.06.22
■ 이 한옥동녘이 열푸름히 열리고 희끗희끗한 서리가 엷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 새를 쫓으러 논으로 향했다. 추수를 앞둔 즈음의 새쫓기는 내가 맡은 임무였다. 옷… 더보기

말하고 싶은 눈

댓글 0 | 조회 910 | 2021.06.10
■ 반 숙자우리 집 파수꾼 미세스 짜루는 해마다 한 번씩 출산(出産)을 한다. 정월 대보름쯤이면 휘영청 찬 달빛 아래 연인을 찾아온 미스터 견(犬)공들이 여기저기… 더보기

소풍

댓글 0 | 조회 828 | 2021.05.25
■ 이 한옥소풍 가는 날은 기분이 붕붕 떴다. 다른 날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나설 차비를 했다. 어머니는 벌써 하얀 쌀밥 도시락을 준비했다. 멸치볶음, 콩자반, … 더보기

사진첩

댓글 0 | 조회 1,051 | 2021.05.12
■ 최 현숙‘똑똑, 택배입니다.’아들이 보냈군요. 큼지막한 두 개의 상자가 사진첩으로 빼곡하네요. 웬만한 것은 버린다더니 추억까지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요. … 더보기

가을 탓인가?

댓글 0 | 조회 972 | 2021.04.29
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투명했다.태풍 ‘산바’가 지나간 며칠 후부터 그랬다.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이 산허리를 감아 피어오르고 나무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마당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