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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米壽, 88세) 기념작> - 단편소설
기내에 오르자마자 좌석을 확인하고 짐칸에 짐을 챙겼다. 잽싸게 먼저 자리를 잡은 석규가 어서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엉덩방아를 찧듯이 털썩 주저앉는 인범을 보며 석규는 히죽 웃었다.
“오늘 기분은 맑음 해도 되겠지?”
누가 석규 아니랄까봐 말투에 장난끼가 섞여 있었다.
“내가 오늘 행운의 카드를 뽑았거든. 분명 여기는 멋진 여인이 나랑 나란히. 히히…….”
그가 역시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 손가락을 옆으로 제꼈다. 아직 비어 있는 자기 옆 빈 자리를 가르키며 하는 말이었다. 인범은 가볍게 눈을 흘겨주며 조용히 하라고 석규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통로가 한동안 어수선했다. 갑자기 뭔가가 인범의 시야를 가렸다. 쳐다보니 어느 여인이 발돋음을 하고 매달려서 짐칸에 짐을 넣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어느새 여인의 등 뒤에는 인범의 기다란 팔이 짐을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럴 땐 키가 좀 컸더라면 좋았을 걸요.”
여인이 발 밑에 놓여진 손가방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근데 어쩌죠. 또 실례를 해야겠네요. 제 자리가 저 안이라서요.”
“아, 네 그러시군요. 어서 들어가세요.”
석규가 어깨를 으쓱하며 비껴 앉는 인범을 살짝 건드렸다. 그것보라는 암시인 걸 인범이 모를 리 없었다. 장시간 여행을 하려면 부담 안 주는 기분 좋은 사람. 남자라면 젊은 여인과 동석하기를 바라는 게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다. 아쉽다면 젊은 여인이 아니라는 거였다. 인범은 촐삭대는 석규를 보며 또래 여인인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기내는 조용해졌고 곧 비행기는 이륙을 했다. 시애틀 공항을 떠나서 한국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어느새 비행기 날개 밑으로 하얀 솜뭉치를 풀어놓은 듯한 뭉게구름이 질펀하게 흩어져 놀고 있었다. 인범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참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처음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갈 때의 일이 스크린을 펼치듯 눈 앞을 어른거렸다. 아득하게 멀어져간 그 옛날…….
비행기 탄다고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던 어린 두 아이들의 천진스럽던 얼굴이 제일 먼저였다. 그들을 바라보며 인범은 미지에 첫 발을 떼는 새로운 도전이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잘 될 것 같은 자신감에 가슴이 부풀기도 했다. 뒤돌아보니 엊그제 같던 그 때가 어느새 40여년 저쪽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귀국길에 오른 게 잘 한 일일까? 반겨줄 사람도, 기다려주는 사람도 한 명 없는 그 황무지에 굳이 가려고 나선 까닭을 알 수가 없다. 그냥 그러고 싶었던 건 아마도 귀소본능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석규가 대책 없는 허영끼라며 말렸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백기를 든 패잔병의 신세가 되어 후줄근하게 돌아가는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다. 많이 늦긴 했지만 쥐꼬리만한 행복이 남았을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 조바심에 모험하듯 마지막 인생길을 맡겨보자는 궁색한 생각이 답이라면 맞을까. 어이없는 억지 고집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신이 있다면 신의 뜻대로 해탈한 마음이 되어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석규의 입장에서는 인범의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 오래 힘든 생활을 하다 보니 혹시 치매끼라도 생긴 게 아닐까. 그런 우려마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석규의 이번 동반 여행도 그래서였다.
인범이 모를 리 없는 석규의 눈물겨운 우정을 뒤로 하는 게 가장 큰 아픔이었다. 긴 세월 사업에만 매달려 살았던 포상으로 마련된 여행이라고 큰소리치는 석규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인범은 이제 다시 만날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더 시려 왔다.
두 사람이 자라온 어렸을 적 배경은 지금과 정반대였었다. 인범의 부모님은 평양에서 피난 내려온 실향민이었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던 아버지는 전쟁 후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어찌어찌 보세물품 장사를 하다가 큰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밑천으로 인쇄업에 뛰어들어 성공의 발판을 굳혔다. 그런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난 인범은 다들 어려운 시절에도 고생을 모르고 성장할 수 있었다.
석규의 아버지는 고물 삼륜차를 가지고 인범네 인쇄소에서 전용 배달을 했다. 6.25 전쟁 참전 상이용사로 약간의 장애를 가지긴 했지만 인품이 착하고 성실했다. 인범의 아버지는 그의 성실함이 맘에 들어 동생처럼 아끼고 믿었다.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움을 가족처럼 지내며 든든해했다.
석규는 부모님이 일찍 결혼을 했기에 딸 하나를 두고 뒤늦게 본 늦둥이었다. 차분하게 공부만 하는 인범과 달리 석규는 장난끼가 심해서 늘 누나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너도 인범이처럼 공부 좀 잘 해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일만 저지르니?”
“내 걱정 마시고 누나나 잘 해. 엄마한테 이른다.”
부모님들이 석규가 늦게 본 막둥이 아들이라 그냥 감싸기만 해서 누나는 늘 불만이었다. 반면에 인범의 아버지는 달랐다. 외아들을 강하게 키웠다. 인범은 아버지의 뜻대로 빗나가지 않고 반듯하게 잘 성장했다. 귀티 나는 얼굴에 하얀 피부, 훤칠한 키. 아버지는 더 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가정과 사업에 충실했다. 성공해야 북에 남겨두고 온 부모님들을 떳떳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게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인범의 가정이 오래 행복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일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원했던 새 집을 짓고 이사 간 첫날밤에 터졌다. 흰페인트 칠로 마감해서 산뜻하고 멋진 새 양옥집 침대에서 잠이 든 부부는 아침에 깨어나지 못했다. 인범이 고2 수학 여행을 떠나서 두번째 날에 전해 들은 기막힌 사고 소식이었다.
사인은 연탄가스(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1960~70년대 ‘침묵의 살인마’라고까지 불렸던 연탄불에 어이없게도 희생이 되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고아 신세로 전락한 인범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인범은 외로웠지만 부모님들이 남긴 유산과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잘 지낼 수 있었다. 석규의 식구들 도움을 받으며 더 열심히 공부에도 집중했다. 성공하는 일만이 돌아가신 부모님들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으로 버텨냈다.
여고를 졸업하고 살림을 익히던 석규의 누나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 연애도 한번 못해보고 시집을 가느냐고 어머니께 반발을 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얼굴이 예뻐서인지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아주 괜찮은 집의 막내 며느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형님이 동생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일찍이 이민을 가서 사업에 성공한 맏형님이었다.
몇 년 뒤 석규의 가족들은 딸의 초청으로 모두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흉가 취급을 받아 팔리지 않던 인범의 집이 팔렸다. 큰 돈을 손에 쥔 그는 아버지께 약속을 했다.
“아버지가 고생해서 모으신 이 돈, 제가 헛되이 쓰지 않을게요. 몇 배로 불려 놓겠습니다.”
인범은 공부벌레로 소문이 나서 친한 친구도 별로 없었다. 인범의 외모를 보고 더러 가까이하려는 여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인범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속마음도 모르는 여학생들에겐 알지 못할 신비감까지 느끼게 되어 다투어 안달을 했다.
불타는 청춘은 드디어 흔들리고 말았다. 그토록 감정 없는 듯한 인범에게도 사랑이 찾아들었다. 아무도 못 말리는 첫사랑이었다. 깊이 잠들어 있었던 사랑의 화산이 무섭게 폭발을 했을까. 외골로만 가는 성향 그대로 한 여인에게 꽂힌 사랑의 화살은 너무도 깊이 박혀버렸다.
강은지. 대학 삼학년 때였다. 다른 학과 동아리에서 우연히 보게 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던가. 은지는 인범의 훔쳐보는 서툰 눈길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하고 혼자서 몸살을 하는 짝사랑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섭도록 아픈 열병을 앓았다. 그녀에겐 이미 다른 남성이 있고 곧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체념은커녕 가슴에 타오르는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 잊어야 한다고 숱하게 마음을 다잡으려 애써도 인범의 마음 안에 싹튼 첫사랑 열병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녀가 떠올라 밤마다 잠들지를 못했다. 살면서 고통이란 경험에 부딪쳐 보지 못한 인범은 죽고 싶도록 괴로웠다.
인범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어쩌지 못해 현실 도피하듯 입대를 해 버렸다. 고된 훈련이 차라리 달가웠다. 혼자서 연병장을 수도 없이 뛰고 또 뛰었다. 국방의 의무를 깨닫기도 전에 삼 년 세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제대를 했다. 인범은 복학을 했다. 은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이미 졸업을 해서 떠나가고 없어 다행이었다.
졸업 직후 선배가 인연을 맺게 해 준 여인과 결혼을 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여고를 졸업한 뒤 작은 개인회사에서 타이피스트로 일을 하고 있었다. 순진하고 조신한 순종형의 여인, 경숙이었다. 아낌없이 사랑하며 연애하듯 살아가리라 했다.
인범은 처가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평소에 좋아하던 태권도장을 차렸다. 직접 사범을 맡아 하다 보니 금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외모가 반듯한 사위 단속을 잘 하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까지 돌았다. 장모님은 착실한 아들 하나 더 얻었다며 너무 사랑을 해주었다. 귀여운 딸 아들 남매도 태어났다. ‘아! 이런 게 진정으로 사람 사는 행복이구나.’ 태권도장에 젊은 여자들의 열풍이 불어닥쳤다. 인범의 사업이 나날이 성공으로 치닫고 있었다. 삶이 재미있었다.
그동안 미국에서 매형 일을 도우며 사업을 익힌 석규는 수년 간 열심히 일한 덕분에 제법 큰 슈퍼마켓을 혼자 운영하는 오너가 되어 있었다. 가끔씩 미국에 들어와 같이 살자고 뜬금없이 유혹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 상해서 인범은 심사가 많이 뒤틀렸다. ‘싱거운 자식, 네가 좀 풀렸다고 까불어대는 데. 어림도 없지.’
인범의 잘 나가는 세월이 몇 년 물 흘러가듯 멋지게 흘러갔다. 인생이 이대로만 계속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권도 배우기가 세차게 열풍을 일으키던 때라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도장이 많이 늘고 있었다. 인범의 도장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했더니 얼마 안 있어 그 숫자가 날로 많아졌다. 인범의 머리가 복잡해지고 초조와 갈등의 시간이 깊어져 갔다. 그 무렵 걸려온 석규의 전화 목소리가 왠지 달콤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지.”
고개를 흔들며 부정을 해보지만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벌써부터였다. 누구보다 먼저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라는 마음이 굳어져가고 있었다. 하루가 급해졌다. 서둘러 도장을 팔아치웠다. 집을 팔려고 했을 때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 처음 장만했을 때의 행복했던 순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기뻐해 주셨던 처가 어른들이 떠올라 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미 사정을 알고 계신 장모님이 먼저 위로의 말을 해 주며 격려해 주었다.
“김 서방. 이제 미국 가면 더 크고 좋은 집에 살 텐데 뭘 그러나. 난 김 서방 믿어.”
눈물이 날만큼 힘이 되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네 식구는 훌쩍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서.
오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다하겠다는 석규의 말이 고마웠다. 처음엔 그렇게 따르기로 답을 했지만 인범의 마음속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걱정 마. 나 혼자 힘으로 당당히 해낼 거니까.’ 낯선 곳에 혼자 떨어져 어쩌냐며 불평을 하던 아내도 어쩔 수 없는지 좋은 낯으로 따라나섰다. 철없는 두 아이들은 비행기를 탄다며 멋도 모르고 신이 났다.
처음 이민 생활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같이 일하자는 석규의 제안을 뿌리쳤다. 미국에서도 태권도 열풍을 일으키고 싶었다. 누구보다 먼저 떠나왔으니 잘 될 것 같다는 마음으로 도장을 차렸다.
조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 발 더 빠른 사람들이 이미 곳곳에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도 한국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인범은 헤쳐 나갈 일들로 불안했다. 하지만 물러나면 죽는다는 각오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입은 보잘 것 없는데 지출은 왜 그리도 많은지. 아찔했다.
오자마자 먼저 번듯한 집부터 샀다. 차도 두 대나 구입했다. 집기며 살림살이들을 장만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다. 쓰던 걸 가져와야 하는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며 호기를 부렸던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멋진 양옥집에 새 살림을 들이자 제일 기뻐한 사람은 아내였다. 자기 몫의 차도 생겼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내에게 살아가면서 진짜 좋은 건 따로 있었다. 여자들 기세가 등등하다는 것. 한국에 살 때는 남편 기에 눌려 말대꾸 한번 못했는데. 이게 웬 세상인지…….
스물세살 나이에 남자다운 외모 하나 보고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의외로 성질이 까다롭고 보수적이었다. 부모님께 못 받은 사랑을 모두 아내에게 원했다. 처음에는 그게 여자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릴 때면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 남편은 소리를 질렀다. 아내는 그게 제일 두렵고 싫었다. 인범은 자기가 그토록 힘든 남편이라는걸 인지하지 못했다. 부부라는 사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차를 굴려야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줄 수 있으니 아내는 운전도 배웠다. 아내는 미국에 와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며 조금씩 변신해 가는 자신이 대견하기만 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동네 한바퀴를 드라이브 했다. 낯선 사람들과 문화의 이질감에 조금씩 스트레스가 쌓여갔는데 드라이브를 하면서 기분 전환이 되어 너무 좋았다. 돈을 쓰는 재미도 조금씩 늘어갔다. 아내에게 좋은 게 많아지는 대신 남편인 인범에겐 더 큰 책임만이 생길 뿐이었다. 모든 게 은행 모기지로 해결할 수 있었으니 열심히 벌어 갚으면 됐다.
인범의 무기는 단단한 체구와 젊은 패기 그리고 성실성이었다. 그거 하나면 안 될 것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세상이 그걸 받아 주어야만 했다.
“저 실례 좀 하겠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여인이 어느 틈에 엉거주춤 반신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범이 급하게 잠든 석규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석규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 네. 아이구, 죄송합니다.”
두 남자는 다리를 모아 통로를 만들어줬다. 그 앞을 조심스럽게 넘어가는 여인의 볼이 빨개져 있었다.
“형아. 너무 귀부인 같아. 말 걸기도 부담스럽네. 그치?”
“조용히 앉아 있어. 너 까불다간 망신당한다. 여기가 너 잘 다니는 술집인 줄 아냐.”
“나도 때와 장소는 구분할 줄 알거든. 사람 알아볼 줄도 알구 말야.”
“그러니 부질없는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영화나 한편 보자. 뭐 좀 재밌는 거 있나 찾아봐.”
석규는 진지하게 인범의 남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리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범이 빈 틈을 주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인범은 친형과 다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저, 죄송한데 자리 좀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자기 자리로 들어가던 여인이 한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듯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요. 창가에는 잘 안 앉는데……. 양해 부탁드릴께요.”
인범이 대답 대신 벌떡 일어나며 석규를 밀었다. 석규가 창가로 밀려가고 인범이 가운데 자리가 되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조심스러워 많이 망설였어요.”
“아 그까짓 게 무슨 일이라고요. 그리 어려워 마세요.”
무심결에 인범이 석규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잔잔히 웃는 여인의 인상이 부드러워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평범한 인상은 아니었다. 귀티가 난다든가 대단한 미인은 아닌데도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약간의 신비감이 든다고 할까. 묘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어디선가 본듯한 인상이기도 했다. 자주 스크린을 통해 보는 탤런트나 영화배우? 그건 아닌데 영 낯설지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인범의 옆에 앉게 된 여인은 편해 보였다. 석규가 어깨를 툭 쳐왔다. 짓궂은 친구의 속뜻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말을 붙여 재미를 좀 보라는 거였다. 문득 인범의 코에서 야릇한 향기를 감지했다. 정말 오랜만에 가까이서 여인의 살냄새를 느낀 것이다. 여인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을 청하는 모습 같았다.
“형, 어쩔래요? 그만 고집부리고 나와 일하면서 삽시다.”
인범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이젠 더 이상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난 돌아갈 거야.”
“가서 뭘 할 건데?”
“걱정 말아. 이렇게 튼튼한 몸 하나 있는데 아직 괜찮지 않니? 사내자식이 설마 이대로 죽지는 않겠지.”
“웃기지 말라고. 우리들 나이가 얼마인지 잊었어? 형, 제발 거울 좀 보라구.”
석규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일을 놓은 지도 벌써 수년 째였다. 정부에서 주는 노인수당으로 살아가는 인범의 맥 빠진 호기에 석규는 은근히 화가 났다.
“인범이 아직 안 죽었다아. 날 보고 형이라고 세상 다 산 줄 아는데. 아직 남았거든. 백수시대도 모르는 놈.”
두 사람은 답답한 가슴을 달래려고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결국 두 남자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두 분은 형제이신가봐요. 꽤 다정해 보이셔요.”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두 남자는 마주보며 그냥 웃기만 했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피로가 좀 풀려요.”
그러면서 손에 쥔 무언가를 내밀었다.
“홍삼이에요. 장거리 여행할 때 하나씩 입에 물고 가시면 좋던 걸요.”
여인이 성냥갑만한 팩을 하나씩 건네 주며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석규의 입에서 ‘땡큐’가 나오다가 얼른 “고맙습니다”로 말을 바꾸었다.
“고맙습니다. 장거리 여행을 자주 하시나 봐요?”
인범이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편이죠. 그런데 두 분은 미국에 사시는 교민이신가 봐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팩을 뜯어 꿀에 재어 말린 홍삼을 꺼내 입에 물었다. 홍삼의 짙은 향기가 기내에 가득 찰 것 같았다. 코리언들이 좋아하는 이 냄새를 외국인들은 어찌 생각할지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저는 독일에 자주 드나들어요. 남편의 근무지가 거기거던요.”
“이번엔 미국에 여행 오셨군요.”
여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머뭇거리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미국에 사는 남동생의 장례식에 다녀가는 길이에요.”
뜻밖의 대답에 놀란 두 사람은 아무 말을 못했다. 여인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인생 참 별것 아니더군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교민인 걸 알고 동질감을 느꼈는지 여인은 계속해서 동생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대학원까지 마친 동생은 미국에 가서 꼭 할 일이 있다며 들어갔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계획대로 안 된 모양이었다. 여러가지 일에 매달려 고생을 많이 했다. 그만 귀국해서 가족들 곁에서 같이 살자고 부모님들이 애를 태웠음에도 듣지 않았다. 동생의 그 일은 겨우 풀려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늦은 결혼도 했다.
“동생의 나이가 50대 중반이에요. 이제부터 오래 품었던 꿈을 펼쳐 보려는 데 암이 찾아왔어요. 폐암이래요.”
수술도 받고 항암 치료도 받아 이제 괜찮다고 걱정말라며 연락 받은 지가 얼마 전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비보를 받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백수 장수시대라고 야단들인데 그 절반을 겨우 살고 간 동생이 너무 불쌍하다고 했다.
인범과 석규 두 사람은 한 귀로는 듣는 척하며 창가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시퍼렇게 펼쳐진 바다 위를 떠 가고 있을 한 점 작은 물체의 비행기. 그 작은 물체 안에도 어김없이 삶의 애환은 담겨 있었다.
인범은 짓눌리는 어깨를 움츠리고 주점 한 귀퉁이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매일을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지 않으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아내의 씀씀이는 나날이 늘어갔고 자기의 본분을 잃어가는 것 같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냉장고에서 차디찬 우유 한 잔 마시고 나오는 게 전부였다. 아내는 이제 출근하는 남편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참을 만큼 참았던 인범이 폭발을 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아내의 방문을 주먹으로 꽝 내리쳤다. 놀란 토끼눈으로 뛰쳐나온 아내는 생쥐처럼 남편 곁을 빠져나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두 아이들의 방으로 가서 차례대로 발길로 문을 세게 걷어찼다.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의아한 눈길로 나왔다.
“너희들은 애비가 뭘로 보이냐? 네들 끼고 자는 강아지만도 못 하지.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아이들은 그때서야 사태파악을 했는지 “아빠가 많이 취하셨나 봐요. 들어가서 쉬세요” 하며 아빠의 양 손에 매달리는 시늉을 했다. 아내에게 터진 불똥이 죄 없는 아이들에게 튄 것 같아 미안했다.
아내가 따뜻한 저녁상이라도 준비했다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방으로 가보니 식탁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아내는 손에 와인잔을 들고 홀짝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그토록 순박했던 아내는 이렇게 돌변해 있었다. 인범은 아내에게 달려들어 술잔을 뺐어 내동댕이를 쳤다.
“미국 왔다고 뭐 믿고 이렇게 간땡이가 커졌냐?”
손이 올라갔지만 간신히 참고 그 대신 발로 빈 의자를 세게 걷어차버렸다. 뭔가에 부딪혔는지 ‘와장창’하는 소리가 났다. 인범은 벗어 놓았던 윗옷을 주워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인범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졌고 확확 달아올랐다.
밤이 깊어 가는 동네는 그지없이 조용했다. 갈 곳이 없었다. 멀지 않은 공원으로 향했다. 지저귀던 새들조차 잠들었는지 너무도 괴괴했다. 불이 켜진 집집마다의 창가가 너무 따뜻해 보였다. 처음 이사 와서 아이들과 함께 놀던 놀이터였다. 엉덩이 작은 아이들을 그네에 앉히고 엄마 아빠가 교대로 밀어주면 “엄마가 밀어주는 게 더 좋아. 아냐, 아빠가 밀어주는 게 더 좋아” 하면서 깔깔대던 아이들이었다. 아득한 옛날 일처럼 그때가 그리웠다.
까만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엄마별 아빠별. 아이들 귀여운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수만 리 밖 혼자 떨어져 있다는 이 기분은 뭘까. 우수수 싸한 밤바람에 희미하게 떨어져 구르는 낙엽이 쓸쓸했다. 저 낙엽만큼도 못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거 같아 서러웠다. 그러나 이쯤에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벌여 놓은 일도 그리고 아내의 일도.
연신 피워 물은 담배 덕이었을까. 아니면 찬바람 덕분일까.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인기척에 놀란 개들이 짖어댔다. 한기를 막으려고 윗옷을 바짝 조이며 집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분위기가 좀 낯설었다. 현관 주변을 서성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현관문에 다가가는 순간 누군가가 자기의 손놀림을 제지했다.
“노, 노오.”
고개를 흔들며 앞을 막아서는 게 아닌가. 현관 주변에서 서성이던 남자였다. 분명 자기의 집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가 조근조근히 영어로 말했다. 그는 사복을 입었지만 폴리스였다. 말인즉슨 네 아내가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과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이혼을 할 테니까 접근을 못하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범은 기절해서 넘어지는 줄 알았다. 순간 “이 나라는 그렇대요” 하면서 장난처럼 들려주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폴리스는 더 이상 기웃거리지 말고 얼른 가라며 인범을 내몰았다. 그걸로 그 집에는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혼을 했지만 책임은 벗어나지 못했다. 인범의 이름으로 진 빚과 아이들 양육비가 목을 죄어왔다.
아내에게 쫓겨난 인범은 도장 한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며 생활을 했다. 이제 더 볼 게 뭐 있냐며 다 걷어 부치고 막일에 나섰다. 마음을 바꾸니 일은 많았다.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뼈빠지게 뛰어다녔다. 그럴수 밖에 없는 삶이었다.
인범이 그 후 들은 아내의 변신은 기가 막혔다. 영어를 배운답시고 끌어들인 젊은 미국청년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소송비 감당이 어려워 눈물을 머금고 참아야 했다.
“선생님 고향은 어디세요?”
침묵이 두려운지 여인이 또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 친구는 아니지만 저는 이북입니다. 부모님들이 피난 내려와서 저를 낳았거든요. 그럼 서울이라고 해야 하나요?”
인범이 말해 놓고 싱겁게 히죽 웃었다. 심심치 않게 해주는 여인의 성격이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동생 일을 겪으면서 생각해 보니 인생이 참 허무하더군요. 그래서 이제 제 남편도 불러들여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인의 남편은 특수 기술 보유자여서 쉽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두 자녀도 결혼시켜 내보내고 너무 쓸쓸해서 언니와 함께 지낸다고 했다. 남편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일이라며 그렇게 오래 일에만 매달려 사는 남자라고 했다.
“이제 얼마나 더 산다고. 제 고집을 꺾으면 안 되겠죠?”
여인이 인범에게 동의를 구하듯 그렇게 말했다. 부드럽던 표정에 결의 같은 게 묻어났다.
“선생님들도 남은 여생 즐겁고 행복하게 사세요.”
여인이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덧붙여왔다.
“여자들은 나이 먹으면 남자들을 귀찮아 하는 거 아닌가요?”
석규가 한마디 픽 던졌다.
“오래 같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겠죠. 우리 부부는 같이 산 날을 전부 합쳐봐야 얼마 안 돼요. 70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왔으니 지금부터 살아봐야 얼마나 더 되겠어요. 그런데 걸리는 게 한 가지 있긴 해요.”
두 남자는 동시에 다음 말을 기다리는듯 여인을 바라봤다.
“여지껏 동생 이야기만 했는데 우리 언니 이야기 좀 해 드릴께요. 재미 있으실 거에요.”
언니는 자기와 성향이 달라서 삶의 지향도 평범하지 않다고 했다. 청순가련형의 생김처럼 마음도 똑 같다고 했다. 부모님들도 모르는 동생인 여인만 아는 비밀이 있었다. 고 3때부터 짝사랑했던 남자를 가슴에 묻고 있어 결혼같은 거는 안 하겠다고 했다. 짝사랑이었지만 첫사랑을 지키겠다는 별난 여인이었다. 그걸로 충분한 행복을 느낀다는 언니를 부모님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시집을 보냈다. 가문 좋은 시댁에 맏며느리였다.
남편 사랑이 유별했는데 웬일인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언니는 그걸 빌미로 이혼을 자청했다. 이혼이 드물던 시대였기에 양가에서 많이 시달렸다. 하지만 끝내 해내고야 말았다. 언니는 그 뒤 시골 조그만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까지 했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첫사랑을 못 잊어 평생 수절을 하셨네요. 그것도 짝사랑을요.”
언니 노후의 꿈은 조그만 암자에 들어가 자연과 함께 살다가 마지막 날을 맞겠다는 거라고 말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졸졸졸 산골을 타고 내리는 샘물소리를 들으며 살다가 가겠대요.”
남편이 돌아오면 언니는 산으로 들어갈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며 안타까워했다.
“아빠, 제 결혼식에 안 오셔도 돼요. 그냥 알려만 드리는 거예요.”
결혼을 앞둔 딸애의 통고를 듣던 날이 생각났다. 신랑은 잘 나가는 미국인 변호사라고 자랑하듯 말했다. 그런 자리에 내세울 것 없는 애비는 참석할 자격도 없다는 뜻이었다. 온 몸의 맥이 탁 풀렸다. 주저 앉을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딸의 통고를 들어야 했던 인범. 무엇 때문에 살아온 인생인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뼛골이 빠지게 양육비를 대주며 키운 자식들인데 참으로 허무하단 생각 밖엔 들지 않았다. 한때 정숙하지 못했던 에미도 앉는 혼주석에 자격이 없는 자기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범이 세상을 부정하고 좌절하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죽은 목숨처럼 버텨온 기나긴 인생. 참 쓸쓸하고 외로운 투쟁이었다.
인범의 혼자 생활은 정말로 피폐했다. 먹는 것도 귀찮아서 거의 굶다시피 하다가 정 힘들면 식당으로 뛰어가 해결하곤 했다. 언제나 구석진 자리에 혼자 쭈그려 앉아 밥을 먹고 나왔다.
무엇보다 힘든 건 밤이었다.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온종일 힘들게 일하다가 집에 오면 아이들이 반기는 게 즐거움이었다. 주말이면 엄마아빠 손에 매달려 재롱을 떨던 아이들. 그런 그림이 눈 앞에 어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부림을 치며 밤을 밝혔다. 사업 외에는 밖에 눈 한번 돌리지 않고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를 꼭 닮은 자기였다. 어쩌다가 여기 미국에 흘러 들어와 이 꼴이 되었는지 안타까웠다.
미치도록 일에 매달리는 게 차라리 나아 아이들 양육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너무 외골로만 흐르는 성격 때문이라며 가끔씩 석규가 룸살롱 같은 델 데리고 갔지만 여자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인범을 핑계삼아 자주 놀러 나가는 석규 때문에 석규 아내에게 은근한 눈총까지 받기도 했다.
“형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
물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불쑥불쑥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치 말을 잃은 사람처럼 어떤 말에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으니 석규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은지를 사랑했지만 열병으로 끝났다. 은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아내 경숙도 사랑했다. 더는 여자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안 될 것이라고 생각되자 그렇게 믿어버린 것이었다. 아이들의 양육비를 대야 한다는 책임만 없다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틀에 박힌 일 말고는 특별한 낙이란 없는 삶이었다.
꽃피는 봄이었는가 하면 어느새 여름이었다. 누렇게 낙엽이 깔린 거리를 거닐며 가을인가 했더니 하얀 눈이 내렸다. 그렇게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갔다. 새파랗던 청춘은 시들어 머리가 벗겨지고 흰머리칼이 생겨났다. 어느 날 식당 구석에서 밥을 먹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혼자 사시우?”
식당에서 밥만 팔면 되었지 손님에게 신상을 묻는 게 기분 나빴다. 한동안 그 식당을 멀리했지만 음식 맛이 그리워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주인 아주머니가 어떤 여인을 데려와 소개시켜 주었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면서 물러났던 인범이었다. 아주머니의 진지한 말에 여인을 눈 여겨 살펴보게 되었다. 인물이 깔끔했지만 그보다 착해 보이는 게 마음에 와 닿았다. 몇 차례 만나면서 인범의 굳게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려가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나 목을 죄어오던 아이들 양육비에서도 이제 벗어났다. 경제적으로 숨 돌릴 만큼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인범은 조심스럽게 여인을 만났고 약해진 마음을 추스려 다시 가정을 꾸리기로 했다. 이제 사랑같은 열정은 없었다. 그냥 노후가 조금 편해지려나 기대를 했다. 여인은 안나라는 영세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왠지 인범은 천주교가 여인의 보증서처럼 미더웠다.
기대한만큼 안나는 따뜻하게 인범을 보살펴 주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평화로움인가. 거실 창가 소파에 누우면 온종일 잠에 빠져들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었다. 가끔씩 석규 내외와 바깥 나들이도 다녔다. 마지막 남은 여생 이제라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안나의 딸 수민이 오기전까지 그렇게 행복이란 걸 느끼고 살았다. 미국에 들어와 대학을 다니겠다고 온 딸에게 안나는 최선을 다 해주었다. 더러 지나치게 눈꼴 사나운 모녀의 행동을 보면서도 인범은 참아주었다. 수민이 공부는 뒷전이었다. 학생답잖은 사치에 남자들 뒤만 따라다녀 제 엄마 속을 썩이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사고를 쳐서 임신을 했다고 했다. 인범은 울화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참고 또 참아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출산 전에 아이 아빠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딸이 나가고 나면 전처럼 편한 날이 오리라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그건 인범의 착각이었다. 다시 불행의 물웅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권을 취득한 뒤 안나의 태도가 나날이 달라져갔다. 인범은 놀라울 뿐이었다. 아기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집을 비우더니 이제 집의 살림은 나 몰라라 하는 안나.
인범은 빈집을 지키며 다시 외로움에 치를 떨었다. 어찌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영주권 없던 여인들이 영주권 받으면 그런 게 다음 수순이라고 들었었다. 설마 그 착한 안나도 그럴 줄이야. 부질없는 일을 또 저질렀구나. 후회도 하기 전에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안나가 짐을 꾸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 참 괜찮은 생각입니다. 산골 물 졸졸졸 흘러내리는 산속, 새들의 합창도 들려오겠죠. 자연은 배신하는 법이 없을 테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결의까지 내보이는 인범의 말에 석규보다 여인이 먼저 놀라는 눈치였다. 인범의 귀국 여행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란 걸 여인은 느꼈다. 인고의 세월이 스치고 간 이마에 깊이 패인 주름이 그걸 증명해 주었다.
곧 인천공항에 도착할 거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조용했던 기내가 어수선해졌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구를 빠져나와 공항 로비까지 여인과 동행을 했다. 여인의 짐이 많아 두 남자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로비에서 인사를 마치고 헤어지려는 찰나였다.
“나 여기 있다.”
어느 여인이 두 팔을 벌리며 여인의 앞으로 다가섰다.
“잘 있었어, 언니?”
두 여인은 끌어안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동생을 생각하는 듯한 슬픔이 느껴졌다. 축축해진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민망한듯 뒤를 돌아보는 여인.
“참, 언니 인사드려. 이 선생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덜 힘들게 왔다우.”
동생의 말이 끝나자 언니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의아한 눈빛으로 인범을 주시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여인의 눈길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저, 혹시 김 선생님 아니신가요? 인 범 오 빠…….”
말을 마치자마자 인범이 앞으로 바짝 다가가더니 덥석 손을 잡았다. 인범이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여인을 응시했다.
“아아 영신이? 그래. 영신이 맞구나.”
인범의 입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신이 인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동생이었다. 얼떨결에 인범도 영신을 끌어안았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영신의 머리가 너무 낯설었다.
영신이 고삼 학생일 때였다. 인범이 아주 잠깐 과외지도를 해 주었다. 나긋나긋하고 조신한 영신 학생은 인범을 선생님이라고 깎듯이 대했다.
“선생님은 무슨?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영신이는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돋보이던 학생이었다.
인범이 강은지에게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릴 때였다. 도망치듯 군에 입대해서 괴로움을 잊으려고 연병장을 수십 번씩 미친 듯 뛸 때 영신이 위문 편지를 보내왔다. 이미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가슴에 위로는커녕 귀찮기만 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편지가 왔지만 결국 읽지도 않았다. 답장은 해 줄 생각도 못했다. 동행했던 여인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었던 걸 깨달았다. 그래 그 영신이. 첫사랑을 품고 평생을 혼자 산다는 언니. 그의 첫사랑이 나였을까? 인범은 놀라웠다.
“인범이 형, 뒤늦게 로또 맞았네.”
석규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동생 여인도 따라서 손뼉을 쳤다.
“울 언니 이제 산에 간다는 말 안 하겠네. ㅎㅎ,”
인범의 품 안에서 영신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인범은 꿈을 꾸는 것 같아 몰래 자기 손등을 꼬집어봤다. 막연했지만 쥐꼬리 만한 행복이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 헛되지 않은 게 너무 신기했다. 이승의 부모님들이 불쌍한 아들에게 내린 선물일까. 아니면 천생연분이 이제야 나타나 늦복을 주는 건가. 허공에 대고 감사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젠 어떤 일이 있어도 놓치지 않으리라. 산골물 졸졸졸 흐르는 산자락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벗하며 이 여인과 함께 소꼽장난처럼 살아보리라.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빠르게 그림이 그려졌다.
영신은 이제 다시는 안 놓치겠다는 듯 인범의 팔짱을 꼭 끼었다. 네 사람은 천천히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니, 차 키 이리 줘요.”
여인이 트렁크를 열더니 세 사람의 가방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팔짱 낀 인범과 언니를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형, 나는 미국행 비행기를 탈 걸 그랬지.”
석규가 한마디를 하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에요. 결혼식에 하객이 없으면 너무 쓸쓸하잖아요. 우리가 축하해 드려야죠.”
여인이 맞장구를 치면서 짓궂은 웃음을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황혼 무렵의 빨간 노을 빛이 참 고왔다. 마지막 불을 토하듯 빛을 뿜는 햇볕이 그들의 차를 포근히 감싸주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여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신혼부부를 어느 호텔로 모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