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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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꽃 필 무렵

0 개 365 이경자

내가 아는 어느 여인의 이름을 허공에 대고 부르니 앞서가던 남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뒤 돌아본다. 모자, 안경, 마스크까지 쓴 그가 긴가민가 하여 잔꾀를 부린 건데, 그가 나를 알아보고 마스크를 벗으며 반가워 한다. 몇년 만인데 우린 참 쉽지 않은 장소에서 조우하게 됐다. 한평생을 살아도 보기조차 드문 한국 해군 함정 안, 가파르고 좁은 층계의 위 아래에서…


갑판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안사람도 잘 있고…?” 그가 멈칫거리더니 검지로 하늘을 가리킨다. 나도 덩달아 윗쪽을 올려다 본다. 갑판 위 연회장엔 좀 전에 교민 환영회에 쓰였던 이유없이 나를 울컥하게 했던 태극기와 뉴질랜드기가 걸려있을 뿐인데 다시 그가 말한다. “죽었어요. 코로나때…” 나는 할 말을 잃고 휘청한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내가 힐책하려는 모든 것을 미리 간파한 듯 그가 되묻는다. “이사 하셨어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그랬었다. 그 무렵 서울에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얼마후엔 또…


모든 연락을 줄이고 집에만 숨어 지내다시피 했었다. 집전화도 핸드폰도 받지 않았던 때가 있었지…하늘 아래 나만 겪는 슬픔인 줄 알았더니, 젊디 젊은 아낙이 내가 귀애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가슴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이 대화의 단절로 묶이면서 우린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한 채 헤어졌다. 이 먼 곳까지 이민와서 겨우 코로나로 아내를 보냈느냐며 가볍게 그의 가슴을 때렸지만, 맞는 그의 눈도 젖어 있었다. 


하긴 그녀는 항상 아픈 곳이 안 아픈 곳보다 많았었다. 나를 만나면 어디도 아프고, 어디도 안 좋다는 말을 어린 양 하듯 말하곤 했었는데, 그럴 때면 “어이구! 안 아픈 곳을 말하는 게 빠르겠다. 허긴 그런 사람이 더 오래 살긴 하더라만…” 하고 웃곤 했었다.


돌아오는 길 브리토마트에 볼일이 있는 형님과 동행했다. 별로 바쁠 일도 없고, 점심은 이미 함정 안에서 손주같은 앳된 수병이 끓여 내 놓은 떡국을 먹었다. 제법 간도 맞고 맛있었다. 적도를 지나왔음직 한 시어진 김치조차 정겨워, 먹으면서 또 마음이 눅눅해 지기 시작했었지만, 떡국은 밥까지 말아 다 먹었다. 하기는 함정과 태극기는 먼 곳에서 볼 때부터 왠지 자꾸 젖어오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는데 예기치 못한 비보까지 듣고보니… 나는 나 스스로 애국자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혐오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나름 기권하지 않고 투표권을 열심히 행사하는, 그리고 항상 태극기엔 좀 과민반응을 하는 이민자다. 


볼 일은 다 끝났는데 날씨는 좋고 일찍 시작한 함대 환영식 덕에 해는 중천이다. 집으로 곧장 돌아가기엔 좀 애매하기도 하고, 이런 날에 혼자 있어서 좋을 것도 없을 듯 하여 형님의 제안으로 기차를 탔다. 그리곤 종점까지 가서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그 지역을 한 바퀴 도는 노선이라 했다. 이 지역이 처음이었던 나는 아! 뉴질랜드는 어디든 공원이야 조금은 과장되게 탄성을 질렀다. 


아직도 해가 남은 귀가길 먼저 내려야 하는 나에게 형님은 검지로 가리키며 저기로 건너가서 그 번호 버스를 타면 금방 간다 한다. 내가 길눈이 어두운 걸 오래전에 알아버린 형님의 표정이 걱정스러워 한다. 그런 걱정은 버스 발판에 한 발 올려놓으면서 이미 시작되었었다. 이 버스는 내가 타려했던 번호는 아니지만 우리 집 앞을 지나다니던 버스였기에 그냥 타보자 하는 의도적인 마음도 작용했었다. 그런데 얼마를 갔는데도 내가 아는 길이 안 나온다. 이 큰 버스에 나 혼자 타고 벌써 한참을 달렸다. 혼자 있으니 감정이 되돌아가 가슴이 먹먹해지며 마음이 헛헛해졌다.


울퉁불퉁한 길도 지나고 양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로 달렸다. 어디까지 왔는지, 건물이 없으니 지표도 없고, 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없는 저녁무렵의 산골길…하는 수 없이 내가 일어나 묻는다. “아자씨! 저기유 지는유 도미니언 로드로 가야하는디유…”  물론 영어로 물었다. 


힐끗 돌아보던 기사가 한심하다는 듯 장황하게 설명을 한다. 당신은 버스를 잘못 탔다. 반대편으로 가야 하는데 좀 더 가면 종점이 있으니 거기서 갈아타고 도로 돌아가야 한다. 엉거주춤 서서 버스에 흔들리는 내가 위태해 보였는지. 아! 알았으니 일단 자리에 앉으라 말한다. 


행색을 보니 곰삭은 쬐그만 동양 할머니가 낮도 밤도 아닌 이 시간에 혼자 버스를 타고 눈을 보니 운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영어를 하고…안돼 보였는지 비교적 친절하게 말한다. 얼마쯤 가니 길가에 버스 몇대가 한가로이 서있고 내려보니 우리 집 가는 번호가 달린 버스가 맨 앞에 서 있었다. 거기가 그가 말하던 종점인 듯 반가웠는데 문이 잠겼다. 나를 내려준 기사는 그 버스가 맞다며 높은 곳에 앉은 채 주먹으로 치는 시늉을 하며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한다. 하지만 안엔 아무도 없다. 결국 그 기사분이 내려와 앞뒤로 확인하고 있는데 저쪽 화장실인 듯한 곳에서 제복입은 중년의 남자가 전화를 하면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안내해 주던 그 분은 저 사람이 맞다고 눈으로 말하곤 자기 버스를 몰고 휭하니 가버린다. 그 후로도 그 기사는 오래 전화를 하고 버스에 들어가선 아예 문까지 걸어잠그고  또 계속 통화를 한다. 나를 밖에 세워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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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은 이미 모든 사물들이 제 빛을 잃어가고 집들도 없고 인적도 끊겼는데, 벽난로 연기인지 초저녁 안개인지 산 아래로 프르스름한 묽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밑으로 펼쳐진 하얀 꽃물결, 부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옛날이 생각났다. 내가 처음 이 곳 뉴질랜드에 도착 했을 때, 지금이 계절적으로 그때 쯤 인 것 같다. 한창 추운 나라에서 왔는데도 그 해의 이곳 여름은 서늘하게만 느껴졌었다. 거의 집에만 있을 때 나무 담장 밑에 피어있는 처음 보는 하얀 꽃을 보고, 어디서 날아온 꽃씨일까 생각하며 파다가 화분에 심어놓고 열심히 보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과 함께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공원 한쪽 언덕을 온통 뒤덮은 하얀 꽃을 보았다. 그 후 그 꽃이 야생부추라는 것을 알게 되었었다. 고국에선 충청도 사투리로 정구지라고도 부르며 가끔 사다 쓰기는 했었지만, 꽃을 보지 못했던 나의 오류였다. 


며칠 뒤 화분에 있던, 이제는 알아버린 부추꽃을 있었던 자리에 도로 심어놓고 미안한 마음에 오며가며 살폈지만 별 탈 없이 잘 자랐었다. 남편은 “당신도 차암…” 하며 어이없어 했었다. 날망에서 내려다 보는 부추 꽃밭의 아름다움에 빠져 운전기사의 늘쩡거림이 하나도 조급하지 않았다. 그리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 생각났다. 나는 메밀꽃도 잘 모른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금을 흩뿌려 놓은 것 같다는 표현은 부추꽃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같은 소설이라도 읽는 독자에 따라, 환경에 따라 그 감흥이 달라지는데 어렸을 땐,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자와 물레방앗간에서 맺은 풋사랑에 재미를 느꼈을 때도 있었고 동이라는 아들의 등장도 경이로웠었다. 요즈음엔 더 이상 갈아줄 수 없이 닳아져 버린, 피까지 질척거리는 늙은 나귀의 발굽을 애처로워 한다.


하얗게 펼쳐졌던 부추 꽃밭이 스멀스멀 어둠에 묻힐 때쯤에 환청처럼 허생원의 늙은 나귀의 방울소리가 들리는 듯 할 때 버스가 환하게 불을 켜고 시동을 건다. 


이것저것 이어지던 많은 상념에, 젖어있던 마음도 추스려졌음인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니 알러지처럼 무서워하는 시간, 어스름한 개와 늑대의 시간은 극복된 것일까? 사위가 캄캄해졌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느린 걸음으로 버스에 오른다. 이런 저런 일로 길고 눈물이 흔했던 하루를 해녀의 숨비처럼 긴 숨으로 몰아낸다. 오는 내내 일찍 뜬 창백한 초승달이 어떻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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