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오기 하루 전날, 인사동에 나갔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더군요. 평일에 한 번 인사동을 갔었는데, 그날의 분위기와 달리 축제의 느낌이었습니다. 외국인들도 많았고, 정독 도서실로 가는 골목길에 공예품을 자판에 진열해 놓고 파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길의 한국 전통 담 아래에 자판들이 늘어서 있는데, 뉴질랜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주 재미있는 정경들이었습니다. 조용한 마을에서 초원과 산 능선 위의 하얀 풍차들만 바라보면서 살았었던 내 눈은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더군요.
한국에서 한 달이란 기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즐거움을 맛보았지만, 이렇듯 예술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거리를 걸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어쩌다 웰링턴에 가서 쿠바 거리를 걸을 때마다 문명인이 된 것 같은 즐거움에 감회가 새로웠는데, 새로운 문화혜택을 즐기는 것 같아서 즐거운 비명이 절로 나왔습니다.
찹쌀떡이 맛있는 찻집에 가서 차를 마시고 몽마르트의 언덕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카페에서 저녁과 함께 맥주도 마시면서 한껏 분위기를 즐겼습니다. 한 달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뉴질랜드 시골에서 살았던 촌티를 제법 벗었는지라 젊음의 거리에서도 그다지 주눅이 들지 않더라고요.
평소 술을 거의 먹지 않았었던 나였지만, 든든한 동생과 친구가 옆에 있기에 부담 없이 기분 좋을 정도로 맥주를 마셨군요. 대학 다닐 때 연극을 한 까닭인지, 남의 눈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라서 그런지 한껏 내 기분을 즐겼던 거 같습니다.
축제 분위기의 밤거리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살면서 이런 기회를 갖는 것도 참 좋은 일이란 걸 알았지요. 기분 좋은 걸음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경쾌한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인 세 명이서 바이올린을 켜는데, 거리의 악사였습니다. 비싼 티켓을 주고 실내 공연장에 가서 들을 수 있는 대단한 솜씨의 연주였는데, 사람들이 주위에 빙 둘러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나는 맨 앞쪽에 그냥 털퍼덕 주저앉아서 연주를 들었습니다. 나처럼 주저앉아서 듣는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멋진 한 곡이 마치자 바닥에 놓여 진 모자에다가 내 동전 주머니 속의 동전들 전체를 몽땅 집어넣었습니다. 500원짜리 동전들도 제법 많은 묵직한 주머니가 납작해졌지만, 한국을 떠나면서 듣는 마지막 연주에 내 사랑을 듬뿍 쏟아 부었습니다.
그렇게 모자에 돈을 넣고 나자 신나는 곡은 다시 연주가 되고 내 몸은 저절로 흔들어지고, 그 음악을 듣는 내내 내 몸은 막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막춤이라고 하지만 그냥 고개와 어깨 온몸과 팔 다리가 가볍게 움직이는 정도였습니다. 상상은 독자에게 맞기지만요.
이렇게 한껏 기분이 고조가 되었을 때, 내 동생은 내 팔을 잡아끌었고, 내 몸은 팔과 더불어 군중들 밖으로 빠져나와 버렸네요. 그때의 아쉬움이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합니다. 하하하.
큰 거리로 나와 빌딩 숲을 지나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부모님 집으로 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나와 함께 지내고 싶으셨지만, 나를 배려하시느라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더군요. 부모님의 사랑에 가슴이 뭉클했지요.
이렇듯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덕분에 한국에서의 한 달을 마음껏 사랑하며 즐길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80을 훌쩍 넘기신 친지들께 인사를 하면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그 분들과 포옹하면서 세월의 무상함도 느꼈지만, 사랑을 가슴으로 마음껏 나누고 돌아온 여행이었군요.
이번 여행은 오직 사랑 속에서 보냈습니다. 가슴 가득히 사랑을 채우고 또 채우면서 보냈는데,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로 돌아오면서 가슴이 허전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오는 내내 소설 ‘카르페 디엠’을 읽으면서 허전함을 버렸습니다. 오늘 이 순간을 즐겨야한다는 생각으로, 사랑 역시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야지, 내일은 늦는다는 걸.......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