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뼘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반뼘

0 개 1,636 박지원
새벽 6시 30분에 일을 시작했다. 오후 2시쯤 퇴근해서 밥을 먹고 멍 때리다가 친구가 의뢰한 영화음악 작업을 했다. 작업을 했다가 밥을 먹었다가 작업을 했다가 잠을 잤다.

조금 지친 건지 몸살이 났다. 편도가 발효된 빵처럼 부풀어 올랐고 3일 내내 열이 계속 오르내리고 땀을 흘렸다. 낡은 소파베드의 중심이 내려앉도록 내내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약간 급하게 그 주에 주말의 여행을 계획했다.

금요일 저녁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오는 여행을 계획했다. 목적지는 넬슨, 경유지는 픽턴이었다. 웰링턴에서 2년 반을 살면서 이제 겨우 세 번째 가는 남섬 여행이었다. 여행을 좋아함에도 그리 많이 가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 첫 번째로는 돈이 문제였겠지만, 무엇보다도 한곳에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여행 취향 탓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11일을 혼자 있었다. 지진이 났었던 곳을 중심으로 세워진 출입금지 철책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배가 출항했다. 오후 6시 30분. 비가 내리고 있었고 파도는 조금 높게 고저를 반복했지만, 청색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잠이 들어버렸다. 세 시간, 깜깜해진 바다에서 들리는 옅은 꿈결 같은 소리가 차츰 분명해지고, 몸을 일으켜 정박한 배에서 내렸다. 픽턴이었다. 나에게 픽턴은 언제와도 좋은 공기를 가지고 있다. 오가는 관광객들과 친절한 현지 사람들. 깔끔하고 낮은 건물들.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소도시의 정석적 표본. 사람들을 어딘가로 조용히 안내할 것만 같은 가느다란 손짓모양의 공기가 잠잠히 고여있는 도시다.

오후 10시. 잠을 자고 일어나 오전 9시. 레스토랑에서 비싸지만 근사한 아침을 먹고 12시 30분에 넬슨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농장으로서의 넬슨은 들어본 적은 있었다. 여행을 계획하기 전 넬슨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2시간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꽤 가파른 경사와 굴곡의 산을 오르는 차체. 몸을 구부릴 수 없는 뱀이 아등바등 구부러진 길을 따라 가는 것 같았다. 어떤 곳은 가드레일도 없어서 산 저 아래를 더욱 까마득하고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뉴질랜드의 지리적 중심이 있다는 넬슨을 가는 길은 까마득하고도 분명했다.

넬슨에 도착했다. 백패커에 짐을 내려놓은 후 거리로 나갔다. 날씨가 궂기로 소문난 웰링턴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산책이었다. 따뜻미지근한 바람이 조그맣게 어깨를 누르고 펴고감을 당분간 기억할 만큼의 그런 온도였다. 냇가 비슷한 강을 주욱 걷다가 아주 오래 전에 만들었다는 다리 하나를 건넜다. 넓은 잔디밭에서 크리켓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나무들이 만들어놓은 그림자 숲의 언덕을 숨가쁘게 올랐다. 예상보다 높았고, 멋도 모르고 멋을 안다고 스니커즈를 신고 온 내 발은 이내 벌겋게 달아올라 뒤꿈치를 툴툴거렸다.

성난 발을 다독이기 위해 신발을 벗고 올라선 뉴질랜드의 중심은, 정말 “아름답다”는 교과서적 표현이 적합하게 들어맞는 곳이었다. 앞으로는 바다가 보였고 뒤로는 산이 보였다. 바다 앞쪽으로는 가지각색 낮은 지붕들이 태양 아래 머물고 있었고, 지붕들 앞쪽으로는 녹색 풀빛 들이 반짝반짝 흔들리고 있었다. 콤파스의 바늘 같은 것을 곧게 땅을 향해 꽂을 듯이 띄어놓은 석조구조물이 정상 가운데에 있었다. 41°30′S 172°50′E.

오후 5시. 한참을 있다가 내려왔다. 다음 행선지는 The Boat Shed Cafe(이하 카페) 였다. 산을 올랐더니 배가 고파서 우선 피쉬앤칩스를 먹었다. 넬슨 중심가를 구경하는데 사람을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잔잔한 바람과 도시의 엠비언스만이 거리를 떠돌았다.

다음 행선지인 카페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고 온 탓에 걷기에는 너무 먼 거리라는 것을 깨닫고 차가 없음을 절망하던 차에 거짓말처럼 택시가 나타났다. 두런두런. 택시기사 아저씨는 2년 전에 술을 진탕 마신 후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두런두런. 나는 당연히 남한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는 웃었다. 거짓말 같은 택시의 공기가 술처럼 좋았다. (계속)

오이

댓글 0 | 조회 1,722 | 2012.11.28
그는 지금 웰링턴에서 가장 바쁘다는,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2평 남짓한 그 식당엔, 17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일본,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더보기

벙어리 장갑

댓글 0 | 조회 1,719 | 2016.05.26
너는 장갑이 싫다고 했다. 장갑이 왜 싫으냐, 물었더니 장갑은 다섯손가락 모두를 만들어야 해서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갑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장갑을 만들기가 … 더보기

너의 스위치였다

댓글 0 | 조회 1,677 | 2013.08.14
딸깍. 열리는 암실의 문.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때때로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포착은 시간을 초월한 채 머리 한 켠에 걸어지는 … 더보기

현재 반뼘

댓글 0 | 조회 1,637 | 2014.12.09
새벽 6시 30분에 일을 시작했다. 오후 2시쯤 퇴근해서 밥을 먹고 멍 때리다가 친구가 의뢰한 영화음악 작업을 했다. 작업을 했다가 밥을 먹었다가 작업을 했다가 … 더보기

침몰

댓글 0 | 조회 1,625 | 2014.11.12
“도” 음정이 맞지 않는 “도”가 또 한 번 울렸다. 청색 지붕, 처마 밑에 자리한 일곱 개의 검은색 확성기가 하늘 아래 햇살을 반사시키며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더보기

江(Ⅰ)

댓글 0 | 조회 1,611 | 2015.01.29
등산이 인생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때때로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혐오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산을 못 … 더보기

오늘

댓글 0 | 조회 1,595 | 2014.06.11
뜻하지 않은 일로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뭐랄까, 먹는 것보다 싸는 게 더 힘든 느낌이 든다. 오늘. 예정대로라면, 나는 발매계약을 했어야 했지만, 뮤직비디오 편집… 더보기

풋내기의 솔직한 노래

댓글 0 | 조회 1,584 | 2013.07.09
예전부터 “왜 그렇게 사람이 빡빡해요?”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팍팍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의 관용구로 해석될 수 있으나, 나의 경우에는 … 더보기

자기소개서

댓글 0 | 조회 1,576 | 2013.06.11
본의 아니게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주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이 뭐하는 곳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충격적인 초고를 이메일로 … 더보기

복종과 공격

댓글 0 | 조회 1,534 | 2012.12.24
1998년 6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빌 클린턴 앞에서 진정한 하의실종을 보여줬다. 당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을 노골적으로 풍자했었던, 이 가학적이면서도 키치… 더보기

배탈

댓글 0 | 조회 1,528 | 2013.02.13
몇 년만에 아픈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심하게 아픈 것은 군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지금이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3일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보기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댓글 0 | 조회 1,521 | 2013.01.31
1.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찍은 단편영화: 늦어도 2월까지는 편집 완료! 2. 랭귀지 스쿨에서 한국말 가르치기: 교재 제작! 3. 정착: 워크비자 준비할 것! 4. … 더보기

질의응답의 시간

댓글 0 | 조회 1,499 | 2012.10.24
CV만 40장째였다. 차가운 웰링턴의 바람만큼이나 핸드폰 수화부에도 스산한 침묵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포화상태를 이룰 때쯤,… 더보기

지느러미

댓글 0 | 조회 1,479 | 2013.10.22
1. 나는 몇몇 여자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야한다. 허세, 조작, 이기가 엉켜서 나 스스로도 통제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연출하는 것은 나의 처세가 되었었… 더보기

음악시간

댓글 0 | 조회 1,475 | 2013.04.24
다음 주까지 각자 음악적인 재주 하나를 가져오면 되는거야. 중학교 시절, 미치광이로 유명했던 음악 선생이 말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어렵다며 불평불만, 투덜투… 더보기

종교

댓글 0 | 조회 1,473 | 2014.07.22
내가 기억하는 한으로, 처음 내가 접했던 종교는 불교였다. 10살 무렵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갔었던 산 속의 어느 조그만 절. 그 절은 정말 깊은 산 구석에 있었는… 더보기

소리

댓글 0 | 조회 1,469 | 2013.03.26
바람결에 흔들리는 투우사의 망토와도 같은, 서걱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영혼의 텍스트들이 두터운 긴장감으로 다다다다닥 머릿속을 훑어내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시간 … 더보기

江(Ⅲ)

댓글 0 | 조회 1,461 | 2015.02.25
노로 어떻게든 뭍을 박차고 배의 방향을 겨우겨우 돌려, 우리는 다리를 저는 아저씨와 아일랜드 커플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정말 걱정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더보기

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의성에 대하여

댓글 0 | 조회 1,446 | 2013.05.28
기차에서 피가 났다, 레일에서 피가 굉음을 내며 흐른다. 줄줄줄줄줄줄줄줄 흐른다 Medina의 You and I를 듣는다. I feel like. I’… 더보기

작업기(Ⅳ) 기다림의 결과

댓글 0 | 조회 1,427 | 2015.03.25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과정을 모르고 기다리는 기다림이 그러하다. 마치 누군가가 미래의 로또번호를 가르쳐주긴 했는데 몇 회 차인지 가르쳐주지 않… 더보기

허세

댓글 0 | 조회 1,427 | 2013.05.14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커다란 잔디밭이 있었다. 오월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광장이 가져다주는 어떤 암울한 느낌을 5월이라는 봄 냄새 가득한 단어로서 상… 더보기

Boy A

댓글 0 | 조회 1,424 | 2013.08.28
초록빛 눈이 오는 날이다. 회개하기 위하여 떠나기가 쉽지가 않아 흔들흔들거린다. 너를 떠날 수 있는 날, 그리하여 다시 너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년은 늘 … 더보기

크라이스트처치 기행 메모

댓글 0 | 조회 1,419 | 2013.01.15
1. 백패커. 나는 1층에 있었고 호주에서 왔다는 한국인은 2층에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었고, 머리 위에 있는 할로겐 조명을 켠 채 노트북으… 더보기

얼굴

댓글 0 | 조회 1,384 | 2013.04.10
영화 <접속>, <공감>,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수많은 애틋한 만남들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미필적 대본 속 우연들이 교집… 더보기

찌꺼기 혹은 빛나는

댓글 0 | 조회 1,381 | 2012.11.14
그는 J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한국에서 다니던 영화 관련 직장을 때려 치우고 외국으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는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워크비자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