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침몰

0 개 1,629 박지원
“도”
음정이 맞지 않는 “도”가 또 한 번 울렸다. 청색 지붕, 처마 밑에 자리한 일곱 개의 검은색 확성기가 하늘 아래 햇살을 반사시키며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확성기들은 도, 레, 미, 파, 솔, 라, 시...를 차례로 순환했다. 음정은 때때로 맞지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그런 곳이었고, 그런 사운드가 울려 퍼지는 마을에서 소년은 자라났다.

소년은 취미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지붕을 갖고 있던 마을의 중심에서 퍼져나오는 7음계를 들으며 물구나무서는 것이, 소년의 취미였다. 물구나무를 서면 뭐가 보이냐며 모두들 소년을 비웃었지만, 소년은 묵묵히 마을의 한 구석에서 물구나무를 서보곤 했다. 팔을 곧게 펴고 마을 위에 거꾸로 매달린 듯한 소년의 모습. 그런 소년의 눈에서는 평소와 조금 다른 것들이 보였다. 줄기와 가지 밖에 보이지 않았던 나무들의 복잡하고도 명료한 뿌리들이 보였고, 땅은 하늘이 되었으며, 이를테면, 달이 해가 되는 그런 환상을 보았다.

그 날도 파란 하늘, 푸른 지붕, 검은색 확성기가 소리를 내며 시간의 간격을 알렸다. 소년은 그 때부터,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오랜 시간동안 거꾸로 세상을 보았던 소년의 머리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지만, 소년이 눈을 못 뗄 정도의 그런 풍경이었다.

“솔”
그 날, “솔”이 확성기에서 새오나온 후, 한 시간, 두시간.. 일곱 시간이 지나도록 라-시-도-레... 같은 소리들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 소년의 눈 안에서, 까마득하고도 선명한 풍경들이 맺혀지기 시작했다.

황색 카메라를 든 자들이 갑자기 마을의 한 구석 어디선가부터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카메라를 아스팔트 위에 내팽개치며 각자의 입들을 벌렸다. 붉은 혀. 마치 그것은 영화제의 레드카펫처럼, 혀들은 줄줄줄 그들의 침기둥 어린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서 쏟아져나왔다. 이윽고 혀는,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처럼 마을 곳곳에로 전시하듯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혀 위에는 살아있는 것 같은 흑백 모조 심장이 펄떡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소년의 동공은 커졌지만, 그 어떤 행인도 혀 위의 흑백 모조심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때 저 멀리서 중년의 남녀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손으로 시작되는 팔을 자신들의 목구멍 깊숙이 넣어 죽어있는 심장들을 꺼내어 바닥에, 공중에 토해내듯 던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간절히 움켜쥐고 있던 죽어버린 심장이 바닥과 충돌하고, 부서진 심장에서는 선홍빛 피가 거리에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자들의 고함소리를 배경으로 황색 카메라를 든 자들의 입에서 나온 컨베이어 벨트 위의 물건들은 조금씩 바뀌어 나오기 시작했다. 죽은 심장, 찢어진 태극기와 성조기, 교복, 굳어버린 눈물... 중년의 남녀들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고, 파란 하늘은 바다가 되어, 거친 파도처럼 물구나무 선 소년의 신체를 무섭도록 감싸오고 있었다. 음정이 맞지 않는 확성기는 여전히, 침묵중, 이었다.

소년은 여전히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머리 안으로 피가 가득 스며 상체와 하체가 새하얗게 되어버리고, 팔이 후들거려도, 소년은 멈출 수 없었다. 머리 안으로 피가 가득 스며 상체와 하체가 새하얗게 되어버리고, 팔이 후들거려도, 소년은 멈출 수 없었다. 소년의 눈 속으로 핏발이 곳곳에 차올라 망막이 터질 듯 떨려왔지만,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너무도 충격적인 그 광경에 눈을 똑바로 뜨고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운동회라도 하는 듯이 붉은 옷을 입은 자들과 노란 옷을 입은 자들이 우르르 모래주머니를 손에손에 들고 마을의 거리 위에 등장했다. 거꾸로 선 소년은 눈알을 돌려 모래주머니가 던져질 박이 달린 높다란 지주대를 찾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곧이어, 그들은 쥐고 있던 모래주머니를 서로 다른 색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아무나- 모두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새빨갛게 피가 들어찬 얼굴의 소년은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까닭에선지, 거리로 뛰어나오던 그들을 기대에 차 지켜보던 몇몇 중년들의 눈에선- 모래와 흡사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을을 뒤덮고 있던 혀 위는 눈물과 모래주머니들로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욕설들과, 울음소리 같은 모래들로 마을은 짙게 가라앉고 있었다.

하늘 아래 가라앉은 짙은 흰 구름들은 공허한 위로처럼, 말이 없었다.
하늘은 그렇게 침몰하고 있었다.

“라”
일곱 시간 후, 푸른 처마 밑 확성기에서 도무지 음정이 맞지 않는, 마이너 키처럼 들리는 메이저 키의 음계가 아주 조그맣게, 겨우, 흘러나왔다. 물구나무를 서고 있던 소년의 머리는 피떡이 된 채 외치지 못한 고함 섞인 눈물 한 줌으로 검은색 아스팔트 위에 옅게 남았다. 붉은 혀들과 황색 카메라들과, 피들과 빨간 옷들과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모래만이 세월같은 바람을 타고 흩뿌려지고 있었다. 물구나무 소년이 사라졌다. 마을의 거리가 사라졌다. 광장이 사라졌다... 봄은 기어코 끝장나버린 것이었다.

침몰.
“시”

벙어리 장갑

댓글 0 | 조회 1,725 | 2016.05.26
너는 장갑이 싫다고 했다. 장갑이 왜 싫으냐, 물었더니 장갑은 다섯손가락 모두를 만들어야 해서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갑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장갑을 만들기가 … 더보기

오이

댓글 0 | 조회 1,723 | 2012.11.28
그는 지금 웰링턴에서 가장 바쁘다는,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2평 남짓한 그 식당엔, 17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일본,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더보기

너의 스위치였다

댓글 0 | 조회 1,680 | 2013.08.14
딸깍. 열리는 암실의 문.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때때로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포착은 시간을 초월한 채 머리 한 켠에 걸어지는 … 더보기

반뼘

댓글 0 | 조회 1,639 | 2014.12.09
새벽 6시 30분에 일을 시작했다. 오후 2시쯤 퇴근해서 밥을 먹고 멍 때리다가 친구가 의뢰한 영화음악 작업을 했다. 작업을 했다가 밥을 먹었다가 작업을 했다가 … 더보기

현재 침몰

댓글 0 | 조회 1,630 | 2014.11.12
“도” 음정이 맞지 않는 “도”가 또 한 번 울렸다. 청색 지붕, 처마 밑에 자리한 일곱 개의 검은색 확성기가 하늘 아래 햇살을 반사시키며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더보기

江(Ⅰ)

댓글 0 | 조회 1,613 | 2015.01.29
등산이 인생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때때로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혐오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산을 못 … 더보기

오늘

댓글 0 | 조회 1,596 | 2014.06.11
뜻하지 않은 일로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뭐랄까, 먹는 것보다 싸는 게 더 힘든 느낌이 든다. 오늘. 예정대로라면, 나는 발매계약을 했어야 했지만, 뮤직비디오 편집… 더보기

풋내기의 솔직한 노래

댓글 0 | 조회 1,585 | 2013.07.09
예전부터 “왜 그렇게 사람이 빡빡해요?”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팍팍하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의 관용구로 해석될 수 있으나, 나의 경우에는 … 더보기

자기소개서

댓글 0 | 조회 1,577 | 2013.06.11
본의 아니게 대학원에 입학하려는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주게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원이 뭐하는 곳이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충격적인 초고를 이메일로 … 더보기

복종과 공격

댓글 0 | 조회 1,537 | 2012.12.24
1998년 6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빌 클린턴 앞에서 진정한 하의실종을 보여줬다. 당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을 노골적으로 풍자했었던, 이 가학적이면서도 키치… 더보기

배탈

댓글 0 | 조회 1,529 | 2013.02.13
몇 년만에 아픈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심하게 아픈 것은 군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지금이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3일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더보기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댓글 0 | 조회 1,524 | 2013.01.31
1.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찍은 단편영화: 늦어도 2월까지는 편집 완료! 2. 랭귀지 스쿨에서 한국말 가르치기: 교재 제작! 3. 정착: 워크비자 준비할 것! 4. … 더보기

질의응답의 시간

댓글 0 | 조회 1,501 | 2012.10.24
CV만 40장째였다. 차가운 웰링턴의 바람만큼이나 핸드폰 수화부에도 스산한 침묵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어 포화상태를 이룰 때쯤,… 더보기

지느러미

댓글 0 | 조회 1,481 | 2013.10.22
1. 나는 몇몇 여자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야한다. 허세, 조작, 이기가 엉켜서 나 스스로도 통제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나를 연출하는 것은 나의 처세가 되었었… 더보기

음악시간

댓글 0 | 조회 1,478 | 2013.04.24
다음 주까지 각자 음악적인 재주 하나를 가져오면 되는거야. 중학교 시절, 미치광이로 유명했던 음악 선생이 말했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어렵다며 불평불만, 투덜투… 더보기

종교

댓글 0 | 조회 1,475 | 2014.07.22
내가 기억하는 한으로, 처음 내가 접했던 종교는 불교였다. 10살 무렵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갔었던 산 속의 어느 조그만 절. 그 절은 정말 깊은 산 구석에 있었는… 더보기

소리

댓글 0 | 조회 1,472 | 2013.03.26
바람결에 흔들리는 투우사의 망토와도 같은, 서걱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영혼의 텍스트들이 두터운 긴장감으로 다다다다닥 머릿속을 훑어내고, 가느다란 담배연기가 시간 … 더보기

江(Ⅲ)

댓글 0 | 조회 1,466 | 2015.02.25
노로 어떻게든 뭍을 박차고 배의 방향을 겨우겨우 돌려, 우리는 다리를 저는 아저씨와 아일랜드 커플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정말 걱정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더보기

생산자와 소비자의 시의성에 대하여

댓글 0 | 조회 1,447 | 2013.05.28
기차에서 피가 났다, 레일에서 피가 굉음을 내며 흐른다. 줄줄줄줄줄줄줄줄 흐른다 Medina의 You and I를 듣는다. I feel like. I’… 더보기

작업기(Ⅳ) 기다림의 결과

댓글 0 | 조회 1,429 | 2015.03.25
기다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과정을 모르고 기다리는 기다림이 그러하다. 마치 누군가가 미래의 로또번호를 가르쳐주긴 했는데 몇 회 차인지 가르쳐주지 않… 더보기

허세

댓글 0 | 조회 1,429 | 2013.05.14
내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커다란 잔디밭이 있었다. 오월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광장이 가져다주는 어떤 암울한 느낌을 5월이라는 봄 냄새 가득한 단어로서 상… 더보기

Boy A

댓글 0 | 조회 1,426 | 2013.08.28
초록빛 눈이 오는 날이다. 회개하기 위하여 떠나기가 쉽지가 않아 흔들흔들거린다. 너를 떠날 수 있는 날, 그리하여 다시 너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년은 늘 … 더보기

크라이스트처치 기행 메모

댓글 0 | 조회 1,420 | 2013.01.15
1. 백패커. 나는 1층에 있었고 호주에서 왔다는 한국인은 2층에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었고, 머리 위에 있는 할로겐 조명을 켠 채 노트북으… 더보기

얼굴

댓글 0 | 조회 1,385 | 2013.04.10
영화 <접속>, <공감>,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수많은 애틋한 만남들과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미필적 대본 속 우연들이 교집… 더보기

한뼘

댓글 0 | 조회 1,383 | 2014.12.24
카페에 도착했다. 도착한 시각 오후 6시. 조금씩 지면을 향해 낙하하는 노을들이 수면 위의 카페를 빛내고 있었다. 폐선을 개조해서 만든 건지. 디자인 컨셉을 그렇…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