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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0 개 1,952 박건호
그는 지금 웰링턴에서 가장 바쁘다는,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2평 남짓한 그 식당엔, 17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일본,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중국, 베트남, 한국 등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이었다. 흠집을 흠뻑 덮어쓴 채 반짝거리는 싱크대와 - 곳곳에 약간의 이물질이 묻어있는-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주방에서 그는 우두커니 있었다. 그의 옆에는 각기 모양과 크기가 다른 초록색 오이들이 종이상자에 담긴 채 치열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형, 너무 힘드네요.”
 
싱크대 위에선 마치 쌀이 손을 씻는 듯, 관을 통해 조그맣게 내려오는 물기둥이 K의 까무잡잡한 손등 위를 번들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져나간 흔적처럼, K의 검은 옷 구석에는 말라붙은 쌀 몇 톨이 매달려 있었다.

잠깐 이리와봐. 그는 K의 등 뒤로 다가갔다. 검은 등 위의 말라붙은 쌀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기름때가 낀 손톱을 이용하여 꾹꾹 집어 쌀 몇 톨을 떼어냈다. 쌀 몇 톨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오이가 담긴 종이상자의 밑면으로 투두둑, 사라져갔다. 저, 그만둘까 봐요. K가 말했다. 그는 K의 등을 툭툭 털어낸 뒤, 허리를 숙여 오이를 상자 밖으로 꺼내며 되물었다. 왜? 너무 힘들어요.

이럴려고 여기 온 건 아닌 거 같아요. 사장한테는 얘기해 봤어? 얘기해 봤죠, 근데 너 말고도 다른 사람도 다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노란 도마 위에 오이를 하나씩 올려놓고 잘 갈려진 칼을 들어 오이의 하얀 속살을 숙련된 솜씨로 잘라내었다. 오이의 아삭아삭한 식감은 이 식당의 요리와 잘 맞았다. 이 식당으로 오는 오이의 씨들은, 오이박스가 부엌 바닥에 내려지는 순간-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했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오이의 씨들이, 검은 비닐 안으로 낙하하여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저는 조금 더 많이 경험하고 싶어요. 여기 식당 말고요. K가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했다. 그는 잘려 나가는 오이와, 오이의 씨를 보며 대답했다. 너,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일해 본 적 없다고 했지? 네. 여기서 일한지 얼마나 됐어? 1달 반 정도..? 괜찮겠어? 괜찮겠냐고요? 뭐가요? K가 되묻자, 그는 잠시 동안 가만히 있다가 화제를 금전으로 돌렸다. 돈. 너 생활비- 괜찮겠냐고.
 
그는 사실 생각했다. 피학과 자학을 해야만, 그리고 가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국에서의 치열한 생활을. 그리고 도시의 거대한 사람들. 신림과 신사를 오가는 전철을 탔을 때 혼자만 작아졌던 그 느낌을. 겨울이 뿜어내는 전철의 숨막히던 고요함을. 아무도 아무의 소리를 듣고 있지 않던 소통이 오고 가던 그 생활들을.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K는, 그러한 생활들을, 나보다 조금 늦게 겪어도 견뎌낼 수 있을까.

K는 생활비 괜찮겠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자신의 금전 상황들을 천천히 대답하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사실 K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후덥지근한 그 여름 왁자지껄 떠들던 친구들과, 에어콘이 흩날려내고 있는 갈색 조명의 차오르던 맥주거품들. 수많은 삶들이 스스로를 빛내는 듯 화려한 빌딩 숲들과, 보도블럭 위를 소리내며 걷는 사람들의 활기 찬 걸음들을 생각했다. 삶의 냄새가 없는 뉴질랜드. 지루하지만 잠 못 들게 하는 타지의 하릴없는 불안함들.
 
오이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잘려져 또 다른 상자 안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상자들은 각기 다른 냉장고로 다시, 들어갔다. 내일 아침이면, 저 오이들은 스스로의 벌거벗은 몸뚱이들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사람들에게 소비될 것이다. 긴 세월을 지나 오이들은 다시 흙이 되고, 꽃이 되고, 꽃가루가 되고 그렇게 수많은 과정들을 거치고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K는 가게를 나왔고, 그는 그 가게에 남았다. 크고 작은 길들이 만나는 그 언저리에, 커다란 시간을 넘어- 먼지가 된 오이가 햇빛에 반짝이며 도시 위에 흩어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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