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가 와인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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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가 와인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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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음주문화는 술에 따라 안주가 정해지는 편이라면 와인 문화권은 음식에 맞춰 와인을 선택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마셔 온 와인은 당연히 음식과 어울림을 고려해서 발달해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음식의 가짓수만큼이나 와인 또한 수 천 수 만가지 일 수 밖에 없다. 와인은 신토불이처럼 같은 땅에서 재배된 재료로 만든 음식과 좋은 매칭을 이룬다. 와인과 음식의 조화를 마리아주(Marriage)라고 하며 서로간의 장점을 살리고 맛과 향을 최상으로 돋보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와인의 종류에 따라 음식과의 궁합은 전통적인 기본이 있긴 하다. 하지만 다양한 응용은 마시는 사람의 몫이다. 
 
무엇보다도 음식의 기본 맛은 단맛, 신맛, 쓴맛, 짠맛이라는 점과 와인의 주요한 구성은 단맛, 신맛, 떫은 맛 그리고 알코올이라는 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 둘의 결합으로 맛을 상승시킬 수도 있고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다. 특히 와인의 알코올은 미각에서 느껴지는 무겁다거나 가볍다거나 하는 질감(Body)에 영향을 준다. 

와인을 마시는 전통은 없었지만 한국의 음식은 의외로 와인과 잘 어울린다. 우리 음식은 적당한 염분, 감칠맛을 주는 매운맛, 부드러운 단맛, 기분 좋은 신맛과 쓴맛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풍부한 과일 향, 균형 잡힌 산도, 둥글고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와인을 선택하면 실패는 없다. 먼저 와인의 매칭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주재료, 조리한 방식, 첨가된 소스나 양념이다. 대체로 우리의 육류요리는 레드와인과 잘 어울리고 생선과 야채는 화이트와인과 잘 어울린다. 특히 제사나 명절 음식처럼 담백한 음식은 드라이하고 쌉싸름한 화이트 와인과 찰떡 궁합이다.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자. 주물럭이나 갈비찜은 단맛이 있고 소스가 많은 요리이므로 타닌성분이 많고 풍미 있는 풀 바디(Full Bodied)의 카베르네 소비뇽이 좋고, 불고기는 소스가 많으나 진하지 않으며 단맛이 있기 때문에 카베르네 멜로나 멜로와 같은 중간 정도의 밀도(Medium Bodied)를 가진 와인이 좋다. 삼겹살에는 가볍고 섬세한 피노누아가 좋고 매콤한 족발엔 카베르네 소비뇽이 제격이다. 레드와인의 타닌이 지방분해를 도와주고 풍부한 과일 향과 맛이 돼지고기의 냄새를 잡아주기 때문이다. 

로스구이나 등심구이는 과일 향이 풍부한 멜로, 통닭구이는 산뜻한 맛의 소비뇽 블랑이나 로제(Rose) 또는 부드러운 피노누아, 생선구이에는 산미와 떫은 맛이 적당히 있고 부케(Bouquet, 숙성된 향)가 강한 고급 샤도네이가 좋다. 야채를 위주로 한 음식은 상큼한 맛의 화이트 와인이 잘 어울리는데, 특히 신선한 봄나물이 듬뿍 들어간 비빕밥엔 그린 애플 향을 중심으로 짙은 과일 향을 가진 피노 그리스가 신선한 재료의 풍미를 살려주고 매운 맛은 덜 느끼게 해 준다. 결국 와인과 음식의 매칭은 상반성을 피하고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김치와는 어떨까? 서구의 술과 가장 한국적인 것의 만남은 의외로 묘한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입안을 자극하는 김치의 맛깔스러움에 와인은 곧 바로 적응된다. 와인의 밋밋함과 허전함을 김치의 넉넉함과 감칠 맛으로 감싸 안는다. 특히 하얀 속살을 드러낸 백 김치의 절제된 아름다움과 세련됨 앞에서 와인은 녹아 내린다. 담백함과 짭조름함, 게다가 고소함까지 백 김치는 와인의 쓴 맛을 포용한다. 

와인과 김치는 태생이 많이 닮아있다. 둘 다 발효음식이고 재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특히 각 지방의 특성과 풍토에 따라 와인과 김치는 팔색조처럼 변신한다. 김치의 백미는 충분히 숙성되면서 나타난다. 잘 익은 김치는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과일 같고 오미(五味)가 두루 갖춰지게 된다. 장독에 담겨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농익은 맛을 만들어 내는 김치처럼 와인 역시 숙성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인다. 풋김치, 푹 삭은 김치, 신 김치와 같이 와인도 숙성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맛과 향을 전해 주는 것이다. 

사실 맵고 새콤한 김치를 직접 와인과 매칭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약간의 각색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김치에 들기름을 넣은 고소하고 매콤한 김치 볶음밥, 김치를 넣은 피자나 김치 빈대떡으로 변신시키면 쉬라즈나 쉬라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말이다. 잘 익은 붉은 과일 향과 맵싸한 향이 넉넉하고 묵직한 타닌과 알코올의 균형이 정열적인 프랑스 론 지방의 기운을 전해주면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맛을 선사한다. 

탐욕에 눈이 먼 상인들로 인해 먹거리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찬 시대다. 하지만 김치 한 가지에 밥을 먹는 사람은 세상에 죄 지을 일이 없다. 그들에게 음식은 절실함이며 세상에 대한 정직함이고 당당함이다. 진수성찬, 산해진미를 찾는 이들이 세상의 죄란 죄는 모두 짓고 산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을 되돌이켜 보라. 음식은 현재 내 삶의 자세이고 본질이며 내 몸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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