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 단어를 보면 사람들은 대개 뭘 떠올릴까.
나는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차라리 고양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도 한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아무 것도 안 하면서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잠만 자고, 끽해야 벽을 향해 돌진하거나 멋대로 침대며 소파 위에 뛰어올라 둥지를 트는, 그런 것. 꽤 나쁘지 않은 생활 아닌가. (물론 인간인 지금 그대로도 자주 뒹굴거리긴 하지만, 고양이가 그러는 편이 훨씬 귀여우니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돌아다니는 것도 대체로 싫어한다. 내향적인 성격 탓도 있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축나는 체력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약속이 잡히거나, 영화관이며 서점 같은 곳은 잘만 짤짤거리고 돌아다니지만 그래도 집이 최고인 건 여전하다.
여행. 이 말만 들으면 왠지 소름이 돋는다. 나가? 어딜? 왜? 뭐하러? 싫어! 집에 있을래! 필요한 건 여기 다 있는데!
하지만 나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안타깝게도) 이따금씩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가보고 싶은 곳들 - 베네치아, 바티칸, 런던, 도쿄, 타히티 - 부터 시작해서,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 곳에도 구별 없이.
떠난다는 행동 자체에는 사실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다. 가방에 짐을 챙겨 넣고 표를 끊은 후 버스에던 기차에던 비행기에던 몸을 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한 번쯤은 앞뒤 걱정하지 않고, 모두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식탁 위에 작은 쪽지 하나만 남겨놓고 무작정 방랑하는 여정을 떠나 보고 싶다. 아마도 그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으리라. ‘머리 식히러 떠납니다. 당분간 찾지 말아주세요. - H.’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집에 돌아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저 단순히 집의 소중함이라던가, 남겨두고 온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걸 느끼기 위해서라기보단 - 돌아올 곳을 위해선 우선 떠나야 하니까. 낯설던 그렇지 않던, 집이 아닌 곳이라고 인식되는 곳, 나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장소는 인간의 귀소 본능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것은 오싹하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은 감각이다. 내가 속한 곳,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므로.
바깥에 나와 한참을 즐기며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낀다.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다. 밤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그럴 때쯤엔 이미 해는 반쯤 진 상태이고, 저녁만이라도 가능하다면 집에서 먹기 위해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두르게 된다. 어차피 그때쯤이면 체력도 바닥이고, 혹시 굽 높은 신발이라도 신고 왔다면 귀가 욕구가 배가되는 것을 느낀다. 놀러 나가도 멀리 나가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것에서일 것이다. 나오는 것은 좋지만 집에서 지나치게 멀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으므로.
살면서 여행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군데 - 하지만 그렇게 많이는 아닌 - 다녀 보았고, 기억에 남는 경험도 있었고 불쾌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강하게 남은 기억들은 여행을 떠난 관광 명소들이며 자연이나 도시의 낯섦, 아름다움이 아닌 그 곳에서 보낸 밤들이었다. 호텔, 또는 모텔에서 가방을 내던지고 익숙하지 않은 욕실에서 한 샤워, 내 것이 아니기에 지극히 불편하고 잠이 안 오던 침대들, 눈을 뜨면 보이던 창 밖의 새로운 풍경. 그것은 사뭇 두근거리기도, 짐짓 불편하기도 했다. 거의 무서울 정도로.
낯선 것에 적의를 품으며 익숙한 요소를 찾는 건 인간의 일차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것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여행을 계획 중이다. 아마도 행선지는 일본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확실한 것은 현재로썬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다. 별다른 세부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보기.
두려우면서도 무척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