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이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서영이

0 개 1,539 수필기행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정서가 풍부하고 두뇌가 명석하다. 값싼 센티멘탈리즘에 흐르지 않는, 지적인양 뽐내지 않는 건강하고 명랑한 소녀다. 버릇이 없을 때가 있지만, 나이가 좀 들면 괜찮을 것이다.


나는 남들이 술 마시느라고 없앤 시간, 바둑 두느라고 없앤 시간, 돈을 버느라고 없앤 시간, 모든 시간을 서영이와 이야기 하느라고 보냈다. 아마 내가 책과 같이 지낸 시간보다도 서영이와 같이 지낸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내가 산 참된 시간이요,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은 물론, 내 생애에 가장 행복된 부분이다. 내가 해외에 있던 일 년을 빼고는 유치원서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일 서영이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왔다. 어쩌다 늦게 데리러 가는 때는 서영이는 어두운 운동장에서 혼자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은 일 년 동안이나 서영이와 떨어져 살던 기억이다. 오는 도중에 동경에서 삼 일 간 체류할 예정이었으나, 견딜 수가 없어서 그날로 귀국했다. 그래서 비행장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나는 택시에 짐을 싣고 곧장 학교로 갔다.


내가 서영이 아빠로서 미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내 생김생김이 늘씬하고 멋지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젊은 아빠가 아닌 것이 미안하다. 보수적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기대가 커서 그것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 무렵 서영이는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글을 읽고 공책에다 ‘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아빠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 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防波堤)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그는 능히 막아낼 수 있으며, 나의 마음속에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나는 ‘서영이도 결혼을 할 테지’ 하고 십 년이나 후의 일이지만 이 생각 저 생각 할 때가 있다.



딸이 결혼하는 것을 ‘남에게 준다’, ‘치운다’ 이런 따위의 관념은 몰인정하고 야속 하고 죄스러운 일이라 믿는다. 딸의 사진을 함부로 돌린다거나 상품을 내어보이듯이 선을 보인다거나 하는 짓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서 보내야겠는데 큰일 났어요. 어디 한군데 천거하십시오.’


이런 소리를 나에게 하는 사람의 얼굴을 나는 뻔히 쳐다본다.


결혼을 한 뒤라도 나는 내 딸이 남의 집 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시집살이는 아니 하고 독립한 가정을 이룰 것이며, 거기에는 부부의 똑같은 의무와 권리가 있을 것이다. 아내도 새 집에 온 것이요, 남편도 새집에 온 것이다. 남편의 집인 동시에 아내의 집이요, 아내의 집인 동시에 남편의 집이다.

결혼은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사랑은 억지로 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사람에 따라, 특히 천품이 있는 여자에 있어서 자기에게 충실하기 위하여 아니하는 것도 좋다.


자기의 학문. 예술. 종교 또는 다른 사명이 결혼생활과 병행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의의 있을 것이다. 결혼 생활이 지장을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퀴리 부인 같은 경우는 좋은 예라 하겠다. 여자의 결혼 연령은 이십대도 좋고 삼십대도 좋고, 그 이상 나이에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청춘이 짧다고 하지만 꽃같이 시들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이런 소원이 있었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걷고 싶다’고. 지금 나에게 이 축복 받은 겨울이 있다. 장래 결혼을 하면 서영이에게도 아이가 있을 것이다.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렇지 않으면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좋겠다.


그리고 다행히 내가 오래 살면 서영이 집 근처에서 살겠다. 아이 둘이 날마다 놀러 올 것이다.


나는 <파랑새> 이야기도 하여주고 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의 엄마처럼 나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장기도 둘 것이다. 새로 나오는 잎새같이 보드라운 뺨을 만져보고 그 맑은 눈 속에서 나의 여생의 축복을 받겠다.


5941fc683cd867de0c0c2d3a69b87707_1592877941_2351.jpg

■ 피 천득

시인, 소설가, 영문학자. 교육자, 번역문학가
금아(거문고를 타고 노는 아이) 피천득 선생의 문학적 시작은 영문학, 시(詩)였다. 하지만  교과서에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많이 실린 영향인지 수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 실린 또는 실렸던 그의 수필은 ‘나의 사랑하는 생활’, ‘인연’, ‘은전 한 닢’, ‘플루트 플레이어’, ‘산호와 진주’ 등이 있고 1930년 <<신동아>>에 ‘파이프’, ‘서정별곡’, ‘서정소곡’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는 <<서정시집>>, <<금아시문선>> 등이 있다.

숲을 바라보며 사는 멋

댓글 0 | 조회 1,008 | 2021.04.13
■ 반 숙자나무는 혼자 섰을 때 아름답다. 나무는 둘이 섰을 때는 더욱 아름답다. 둘과 둘이 어우러져서 피어났을 때 비로서 숲을 이룬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 더보기

아버지의 바다

댓글 0 | 조회 1,085 | 2021.03.24
등대 아래 방파제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눈앞에서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파도는 무슨 사연이 저리 많은지 금세 모든 이야기를 다 해줄 듯 다가왔다 사라진다.… 더보기

백일몽

댓글 0 | 조회 1,153 | 2021.03.10
■ 반 숙자과수원 농지를 물색하러 다녔다. 지구는 오염돼 있고 인구 폭발로 마땅한 대지가 없어 고심하다가 너르디넓은 태평양 상공에 몇 필지를 구했다. 우선 여기서… 더보기

오래된 풍경

댓글 0 | 조회 1,002 | 2021.02.23
‘풍경은 자기 안의 상처를 경유하면서 해석된다.’고 하던가. 그럴지도 모른다. 풍경 속에서 떠올리는 것들은 대개 자기 안의 익숙한 어떤 것들이다. 자라면서 독특하… 더보기

피아노

댓글 0 | 조회 1,155 | 2021.02.11
카페 음악 방에 영화음악 ‘피아노’가 올랐다. 영화의 여러 장면이 떠올라 한나절을 음악에 묻혀 지냈다. 그 영화를 본 것은 1993년, 촬영지가 ‘뉴질랜드’라는 … 더보기

돼지고기 반근

댓글 0 | 조회 1,381 | 2021.01.28
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날 밤이었다. 어두운 얼굴로 나가신 아버지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발자국 소리가 우리 집 대문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소금이 … 더보기

나는 가짜다

댓글 0 | 조회 1,166 | 2021.01.12
나는 젊었을 때 제법 많은 레코드를 갖고 있었는데 거의 복사판이었다. 진품은 헤리 베라폰테Herry Berrafonte의 <카네기홀 공연실황> 음반과 … 더보기

그 집 앞

댓글 0 | 조회 1,175 | 2020.12.22
그 집은 강둑 아래 있다. 강 맞은편 들녘에 외따로 서있다. 강둑은 내가 자주 걷는 길이라 대문을 나서면 발길이 곧장 그리로 향한다. 둑 어귀에서 눈에 들어와, … 더보기

그건 내 문제가 아냐

댓글 0 | 조회 1,044 | 2020.12.08
지구가 가속도로 메말라 간다. 화석 연료를 너무 많이 태우고 푸르던 땅을 죄 갈아엎어 생겨난 기후 변화 탓이란다. 어느 곳 할 것 없이 물이 바닥나 아우성이고 아… 더보기

오십대를 저글링하다

댓글 0 | 조회 1,479 | 2020.11.25
‘KBS 전국노래자랑’은 남편과 내가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이다. 출연자의 노래가 시작되면 화면 아래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직업이 간략히 소개된다. … 더보기

나의 사랑하는 생활

댓글 0 | 조회 1,182 | 2020.11.10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오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 더보기

오이소박이 (5)

댓글 0 | 조회 1,415 | 2020.10.28
약속한 목요일.부축하듯 입구를 들어서는 두 남자. 손님들이 성글게 차 있는 초저녁부터 문이 여닫힐 때마다 시선을 모으던 한씨아줌마가 달려 나가 맞이한다. 마침 지… 더보기

오이소박이 (4)

댓글 0 | 조회 1,158 | 2020.09.22
한국이 IMF의 직격탄을 맞았을 때 남편은 다니던 자동차부품 생산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실직자가 되었다. 갈피를 못 잡던 남편은 이것저것 알아보며 시도해보았지… 더보기

오이소박이 (3)

댓글 0 | 조회 1,274 | 2020.09.09
진수는 어렸을 때부터 오이소박이를 좋아했다. 갓 버무린 것부터 시작해서 익은 것까지 다 좋아했다. 오이소박이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녀석이었다. 경… 더보기

오이소박이 (2)

댓글 0 | 조회 1,339 | 2020.08.25
이민 10년차인 한씨아줌마는 남편이 한인교회에서 허드렛일을 봐주며 살아간다고 했다. 이민선배라고 해서 별반 사정이 나아보이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고향… 더보기

오이소박이 (1)

댓글 0 | 조회 1,266 | 2020.08.11
“배라먹을 짜식!”입안의 담뱃가루를 뱉어내듯, 뱉어낸다. 아리랑식당의 뒤뜰, 울타리 가의 벤치 위에 쏟아지는 오후 3시의 초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경애는 주방장 … 더보기

이쁘지도 않은 것이

댓글 0 | 조회 1,635 | 2020.07.28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연둣빛으로 번져 온다. 여기 저기서 논 갈고 밭가는 경운기 소리가 활기차게 들린다. 일철이 온 것이다. 아침부터 뽑는 풀이 겨우 한 이랑… 더보기

댓글 0 | 조회 1,384 | 2020.07.15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사시오?”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렇기도 하다.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진리로 … 더보기
Now

현재 서영이

댓글 0 | 조회 1,540 | 2020.06.23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 더보기

엄마

댓글 0 | 조회 2,328 | 2020.05.29
마당으로 뛰어내려와 안고 들어갈 텐데 웬일인지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또 숨었구나!` 방문을 열어봐도 엄마가 없었다. `옳지 그럼 다락에 있지` 발판을 … 더보기

노모의 화장化粧

댓글 0 | 조회 2,272 | 2020.04.24
‘외출할 때 남자는 지갑을 챙기고, 여자는 화장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결혼 생활 수십 년에 이 말이 남녀 특징의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두둑한 지갑… 더보기

코비드 유감

댓글 0 | 조회 3,738 | 2020.04.16
■이 한옥​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먹장구름이 내려앉고 회오리바람이 소나기를 몰고 간다. 공포의 구름, 죽음의 비다. 오가지 말라는 봉쇄령이 내려진 지 달포가 지… 더보기

이웃 3 - 밴트와 마샤

댓글 0 | 조회 1,152 | 2020.03.25
■ 이 한옥밴트가 목에 깁스를 하고 베리와 이야기 중이었다. 우리 집과 베리 집과 밴트 집의 뒷마당 경계점은 앵무새 키아 Kea 한 쌍이 사는 포후투카와 나무와 … 더보기

이웃 2 - 마틴

댓글 0 | 조회 1,257 | 2020.03.10
■ 이 한옥장마가 지나간 후여서 잔디가 발목을 덮을 만큼 우북수북 자랐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잔디를 깎으려고 앞마당으로 나왔다. 초겨울 폭풍에 부러진 나뭇… 더보기

이웃 1 - 베리

댓글 0 | 조회 1,293 | 2020.02.25
■ 이 한옥앞마당이 어둠침침하다. 담장 가운데에 우뚝 선 나무가 무성히 자라 아름드리가 되더니 시야를 가리고 전선줄까지 침범한다. 계절을 모르는 상록수다. 뼛속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