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4~5만원 (내가 한국을 떠나오던 2011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만 내면 대한민국의 초중고생은 학교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일부 지역 학교에서는 아예 돈도 받지 않는다. 물론 세금으로 충당한다. 큰일은 아니지만, 자잘하고 성가신 고민일 수밖에 없는 도시락 반찬의 고민으로부터 엄마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의 급식은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 것인지.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 도시락을 쌌다. 간혹 동생 도시락도 싸주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는 구내식당의 밥이 부실하기도 하고, 또 용돈도 궁해서 왠만하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다. 후다닥 만든 달걀 부침개와 김치 몇 조각이 전부인 도시락이지만, 집에서 압력밥솥으로 한 밥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도무지 포만감을 주지 않는 구내 식당 밥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학원 시험공부를 위해 일 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도서관에서 보냈던 시절, 마침 집안에 뜻하지 않은 불행이 겹쳐 버스비조차 얻기가 미안해 늘 도시락 2개와 자판기 커피 두잔 값,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비만 갖고 살았다. 그럼, 학교 갈때는 어떻게? 오빠의 회사용 봉고를 얻어타는 일이 절대적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오빠를 살살 달래가며 깨워서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며 아침을 먹였다. 오빠는 회사가는 길에 나를 학교 앞에 떨궈 주었다.
2012년 8월, 나는 아침이면 네 개의 도시락을 싼다. 그렇게 산 지가 일 년하고도 8개월이 다 되어간다. 내가 사는 곳은 뉴질랜드의 웰링턴. 한국에서 저 멀리 남쪽 바다, 남극쪽을 향해 가다보면 호젓하게 있는 섬나라다. 주변에 덩치 큰 호주와 자잘한 남태평양의 섬들을 벗삼아 있긴 하지만, 세계 지도에서 보면 아메리카대륙이나 아시아와 적당히 떨어져 있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사는 모양새다. 아이들의 가슴이 오그라들 정도로 경쟁을 부추기지도 않고, 국영수 점수로 줄을 세우고 ‘사람’을 평가하지도 않는다. 축복받은 자연속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체험하며 서로 서로 친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사는 곳이 이곳 뉴질랜드이다.
다시 도시락으로 돌아가자. 처음에는 반찬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한국식으로 밥과 김치를 싸주면 다른 친구들이 냄새난다고 싫어할까 걱정되고,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싸주자니 소화기관이 이미 쌀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빵종류를 먹으면 도무지 한끼를 해결한 것 같지 않은 허전한 느낌은 나나 애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소고기와 김치를 다져 속을 넣은 삼각김밥, 참치를 넣어 만든 김밥, 간혹 서비스로 김치 볶음밥, 그러다가 밥 종류는 충분히 먹었다, 싶으면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싸주곤 했다. 물론 샌드위치를 싸 준 날이면 아이들이 문열고 들어오면서 ‘오늘 점심은 배 고팠어.’로 인사말을 대신하곤 한다.
도시락 네 개를 싸는 일이 어느 정도 이력이 나자, 이제는 아기자기하게, 한쪽에 비스킷, 사과 한 알, 통상 한국식 김밥의 반 정도 길이의 스시(! 연어를 넣기도 하니까)와 앙증맞은 물고기 모양의 간장 종지도 넣어준다. 그러다 ‘엄마, 친구들이 왜 나는 그렇게 좋은 도시락 가져오냐고 막 부러워해’ 라는 아들의 한 마디에 도시락에 쏟는 정성은 이제 ‘적정’ 선을 넘어 ‘과’하게 된다. 한국에서 공수해 온 보온도시락에 카레도 싸주고, 닭죽도 준비한다. 소고기가 유난히 싼 덕분에 소고기를 자주 먹게 되는데 소고기 산적에 완두콩, 삶은 당근으로 색깔까지 맞춰주면, ‘엄마, 오늘 도시락 최고였어.’ 라는 듣기좋은 보상성 멘트가 돌아온다. 이곳 아이들은 빵에 잼을 발라오거나 샌드위치에 사과 한 알 혹은 바나나를 싸온다. 그런데 거의 매일 같이 (이곳에서 비싼) 스시에 온갖 요리형 음식을 도시락으로 싸오니 아이들이 감탄하는 것도 당연하지 싶다.
멀리 타국 땅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문득 설거지를 하다가, 도시락을 싸다가, 혹은 먼 산을 한번씩 바라보다가 친정 엄마와 외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지는 일이 잦다. 특히 아이들 도시락 반찬을 궁리하다보면, 국민학교 시절(나는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대개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에 열리는 운동회에 엄마가 쌌던 삼단 법랑 찬합 도시락이 떠오른다. 그 시절, 부모님은 조그만 읍면에서 양장점을 운영하셨다. 아버지의 손끝이 꼼꼼하고 옷이 차르르 떨어진다는 소문에 장사는 제법 잘 되었다. 학교 선생님 중 단골도 더러 있었다. 당시의 양장점 중 상당수는 무슨 무슨 ‘라사’라고 불리곤 했지만 (어원은?) 우리 집은 자연스럽게 불란서를 떠올리게 되는(근거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꽃잎싸롱’이었다. 그리고 당시 어린 나는 무슨 근거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싸롱’이라는 이름이 무슨 ‘라사’보다 훨씬 더 근사하다고 느꼈다. 꽃잎이라는 다소 촌스러울 수 있는 명사에도 불구하고 싸롱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이게 엄마의 취향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항상 ‘꽃잎싸롱’과 어울리게 꽃가라풍의 셔츠며 치마바지를 즐겨 만들어 입었고, 그 취향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내 옷장속은 자잘하거나 과감한 꽃무늬로 꽃밭을 이루고 있다.
양장점에는 시다로 불리는 초보 견습생과 미싱 전문가, 그리고 재단을 배우는 이러 저러한 사람들이 늘 들고 났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가 매끄럽게 딱 떨어지는게 아니라, 같이 밥도 해 먹고, 어느 정도 일이 손에 붙으면 얼마간의 급료도 주어지는, 그 당시의 관습이라고나 할까. 그런 양장점 식구들에게 우리들의 운동회는 공식적으로 ‘외식’을 하는 날이었다. 운동회 찬합은 평소에 먹기 힘든 소고기 산적, 소세지 달걀 부침, 매콤새콤하게 무친 도라지 등으로 알록달록했다. 엄마는 유난히 운동회 도시락에 정성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성당이나 친목계에서 야유회라도 가게 되면, 양장점의 이런 저런 소소한 일들을 챙기느라 바쁜 와중에도 장을 봐서 고기를 재고, 나물을 무치고, 소세지를 부치셨다. 소세지 달걀 부침이 없는 도시락은 상상할 수 없다는 듯이. 엄마한테는 그렇게 풍성한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서 펼쳐놓고 먹어야만 하는 게 운동회이고 야유회였다.
엄마와 손 아래 이모가 어렸을 적에 과부가 된 외할머니는 생활이 어려웠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때만 되면 떡을 하네, 전을 부치네 하며 부산스런 이웃집을 보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는 가난한 살림에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 엄마는 추석이나 설이 되면 어린 나까지 동원되서 하루종일 부쳐야 할 만큼 많은 양의 전거리를 준비하고, 떡을 하고, 식혜도 앉히고, 문어를 삶아서 빨래줄에 널어 놓느라 바빴다. 지지미를 부치는 냄새가 나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엄마는 어려서의 한풀이를 하는 거였고, 남들 보기에 민망하지 않은, 외려 풍성한 색색깔 도시락 찬합으로 이제는 먹고 살만한 사정을 당당하게 드러내 보이는 거였다.
남들에게 먹고 살만하다는 나의 사정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나고 자란 고향땅이 아닌 물 설고 낯설은 곳에서 나는 매일 아침 찬합 도시락에 버금가는 ‘스시 도시락’을 싼다. 간장과 생강, 그리고 마늘과 물엿으로 양념한 닭 가슴살과 연두색깔이 고운 그러나 맛은 과일답지 않게 기름진 아보카도를 넣어 만든 스시, 착한 가격으로 즐길수 있는 소고기를 불고기 양념으로 재서 김치와 같이 싸는 소고기 김밥, 혹은 연어를 넣은 스시로 도시락을 싼다. 한쪽에 사과나 오렌지 한 개를 넣어서 식후 입가심까지 배려해준다.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싸주면 아이들은 돈을 벌어온다. 공짜가 익숙치 않은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뭔가를 얻고 싶으면 1달러라도 돈을 낸다. 그래서 잇속이 제법 빠른 둘째 녀석은 김밥을 넉넉히 싸주는 날이면 한 사람당 2달러씩 받고 친구 두 명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단다. 한국식 정서로는 선뜻 잘했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친구들이 먼저 돈을 주고 사먹겠다고 했다니 굳이 뭐라고 혼낼 수도 없다. 다음번에는 돈 받지 말고 친구들과 한 두개씩 나누어 먹으라고 말하고 만다.
그래도 나는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는 방학이 젤 좋다. 앞으로 3학기 방학까지는 앞으로 5주 남았다. 쓰고 보니 앞으로 한참이나 남았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