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살면서 가장 큰 변화라면 바로 쉽게 자연을 즐기는 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주 내륙이 아니라면 웰링턴이나 오클랜드 어디서나 아름다운 해변에 쉽게 갈 수 있다. 일단 도로로 나섰다 하면 몇 시간이고 ‘극기훈련’을 해야 하는 한국의 사정과 달리, 교통체증이 없고 (오클랜드 일부 지역은 사정이 다르다고 들었음) 아무리 경관이 수려한 곳이라도 사람이 붐비는 곳이 적어, 나와 똑같은 날에 똑같은 장소로 떠나는 수많은 인파속에서 ‘경쟁’하고, 자리를 잡자마자 도시락 펼쳐놓고 또 ‘경쟁’하듯 먹고 난 후, 휴일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휴가와는 전혀 다르다.
치킨 튀기고 김밥 싸고 과일 챙겨서 ‘자리’ 잡자마자 펼쳐놓고선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먹고 소리 지르고 뛰어다닌다. 우리의 휴가가 대개 그랬다. 잘 먹어야 하고 잘 놀아야 했다. 이제 우리도 ‘소풍’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배우고 진짜 즐겨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소풍을 가장 잘 즐기는 사람들은 영국 사람들이다. 실제 전통적으로 그들에게는 소풍 문화가 있다. 야외에 나가서 차 한잔을 마시더라도 제대로 된 도기 찻잔, 냅킨, 온갖 간식거리를 챙겨서 시를 읊고 책을 읽으며 대화하면서 자연을 즐긴다. 물론 먹고 살만했던 사람들 얘기다.
웰링턴으로 와서, 아이들 학교 문제며 이런 저런 문제로 바쁘게 몇 달을 보내고 난 후에야 슬슬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4km 트랙을 갖춘 푸른 잔디밭의 동네 공원은 ‘꿈의 구장’처럼 황홀해 보였고, 차 타고 15분이면 닿는 해안가에서 바라보는 쿡 스트레이트 (Cook Strait)는 날씨에 따라 그 파랑이 천차만별이었고 언제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쨍한 파랑, 옥빛 파랑, 어두운 파랑, 희미한 파랑 등 바다가 창조하는 파랑은 참으로 여러가지 였다. 거기다 웬만큼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눈 덮인 남섬의 산봉우리가 마치 히말라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고 차를 끓여 먹을 도구를 챙기고 여기저기 소풍을 다니다보니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끌리는 장소를 만나게 된다. 소풍도 여러 번 다니다보니, 자외선 지수가 최고라는 이곳 햇볕은 손, 목, 그리고 발목 여기저기에 경계를 만들곤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텐트. 캠핑을 다닐 때 가지고 다니던 것을 챙겨서 해를 등지는 명당에 자리 잡고 너른 바다를 보는 것. 눈과 마음이 호사롭기가 이를 데 없다.
텐트 안쪽에서 바라본 곳이 내가 즐겨찾는 타라키나 베이다. 오른쪽 등선 너머가 웰링턴 공항이고 남섬으로 가는 페리를 멀리서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원시로 돌아가서 온갖 나무 막대기를 장난감 삼아 놀고, 나는 텐트안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처음에는 따라나서는 걸 귀찮아하던 아이들도 조금씩 여유를 부리는 것이 무언지 알아가며 자연을 맘껏 즐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웰링턴에서 살면서 자주 시댁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내 시댁은 제주다. 웰링턴 어디를 가든 제주의 풍경이 자꾸만 눈에 밟히곤 한다. 그러고 보니 제주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는 듯 했다. 늘 명절을 지내기 위해서, 일을 위해서 다녀서일까. 그래서 꿈꾼다. 한국에 간다면 반드시 제주의 곳곳을 누벼보리라.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올레길, 중산간 목축 마을의 풍경, 밭과 밭 사이를 이루는 돌담들...
무심하게 보아 넘긴 것들이 먼 이국 땅에서 자꾸만 눈에 아른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