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오이

0 개 1,716 박건호
그는 지금 웰링턴에서 가장 바쁘다는,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2평 남짓한 그 식당엔, 17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일본,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중국, 베트남, 한국 등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이었다. 흠집을 흠뻑 덮어쓴 채 반짝거리는 싱크대와 - 곳곳에 약간의 이물질이 묻어있는-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주방에서 그는 우두커니 있었다. 그의 옆에는 각기 모양과 크기가 다른 초록색 오이들이 종이상자에 담긴 채 치열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형, 너무 힘드네요.”
 
싱크대 위에선 마치 쌀이 손을 씻는 듯, 관을 통해 조그맣게 내려오는 물기둥이 K의 까무잡잡한 손등 위를 번들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떨어져나간 흔적처럼, K의 검은 옷 구석에는 말라붙은 쌀 몇 톨이 매달려 있었다.

잠깐 이리와봐. 그는 K의 등 뒤로 다가갔다. 검은 등 위의 말라붙은 쌀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기름때가 낀 손톱을 이용하여 꾹꾹 집어 쌀 몇 톨을 떼어냈다. 쌀 몇 톨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오이가 담긴 종이상자의 밑면으로 투두둑, 사라져갔다. 저, 그만둘까 봐요. K가 말했다. 그는 K의 등을 툭툭 털어낸 뒤, 허리를 숙여 오이를 상자 밖으로 꺼내며 되물었다. 왜? 너무 힘들어요.

이럴려고 여기 온 건 아닌 거 같아요. 사장한테는 얘기해 봤어? 얘기해 봤죠, 근데 너 말고도 다른 사람도 다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노란 도마 위에 오이를 하나씩 올려놓고 잘 갈려진 칼을 들어 오이의 하얀 속살을 숙련된 솜씨로 잘라내었다. 오이의 아삭아삭한 식감은 이 식당의 요리와 잘 맞았다. 이 식당으로 오는 오이의 씨들은, 오이박스가 부엌 바닥에 내려지는 순간-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했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오이의 씨들이, 검은 비닐 안으로 낙하하여 굴러 떨어졌다.

그래서 그만두려고요. 저는 조금 더 많이 경험하고 싶어요. 여기 식당 말고요. K가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했다. 그는 잘려 나가는 오이와, 오이의 씨를 보며 대답했다. 너,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일해 본 적 없다고 했지? 네. 여기서 일한지 얼마나 됐어? 1달 반 정도..? 괜찮겠어? 괜찮겠냐고요? 뭐가요? K가 되묻자, 그는 잠시 동안 가만히 있다가 화제를 금전으로 돌렸다. 돈. 너 생활비- 괜찮겠냐고.
 
그는 사실 생각했다. 피학과 자학을 해야만, 그리고 가학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국에서의 치열한 생활을. 그리고 도시의 거대한 사람들. 신림과 신사를 오가는 전철을 탔을 때 혼자만 작아졌던 그 느낌을. 겨울이 뿜어내는 전철의 숨막히던 고요함을. 아무도 아무의 소리를 듣고 있지 않던 소통이 오고 가던 그 생활들을.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K는, 그러한 생활들을, 나보다 조금 늦게 겪어도 견뎌낼 수 있을까.

K는 생활비 괜찮겠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자신의 금전 상황들을 천천히 대답하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사실 K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후덥지근한 그 여름 왁자지껄 떠들던 친구들과, 에어콘이 흩날려내고 있는 갈색 조명의 차오르던 맥주거품들. 수많은 삶들이 스스로를 빛내는 듯 화려한 빌딩 숲들과, 보도블럭 위를 소리내며 걷는 사람들의 활기 찬 걸음들을 생각했다. 삶의 냄새가 없는 뉴질랜드. 지루하지만 잠 못 들게 하는 타지의 하릴없는 불안함들.
 
오이들이 일정한 모양으로 잘려져 또 다른 상자 안으로 나뉘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상자들은 각기 다른 냉장고로 다시, 들어갔다. 내일 아침이면, 저 오이들은 스스로의 벌거벗은 몸뚱이들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사람들에게 소비될 것이다. 긴 세월을 지나 오이들은 다시 흙이 되고, 꽃이 되고, 꽃가루가 되고 그렇게 수많은 과정들을 거치고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K는 가게를 나왔고, 그는 그 가게에 남았다. 크고 작은 길들이 만나는 그 언저리에, 커다란 시간을 넘어- 먼지가 된 오이가 햇빛에 반짝이며 도시 위에 흩어져가고 있었다.

江(Ⅰ)

댓글 0 | 조회 1,605 | 2015.01.29
등산이 인생이다,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때때로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혐오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산을 못 … 더보기

침몰

댓글 0 | 조회 1,623 | 2014.11.12
“도” 음정이 맞지 않는 “도”가 또 한 번 울렸다. 청색 지붕, 처마 밑에 자리한 일곱 개의 검은색 확성기가 하늘 아래 햇살을 반사시키며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더보기

반뼘

댓글 0 | 조회 1,631 | 2014.12.09
새벽 6시 30분에 일을 시작했다. 오후 2시쯤 퇴근해서 밥을 먹고 멍 때리다가 친구가 의뢰한 영화음악 작업을 했다. 작업을 했다가 밥을 먹었다가 작업을 했다가 … 더보기

너의 스위치였다

댓글 0 | 조회 1,674 | 2013.08.14
딸깍. 열리는 암실의 문. 외면하고 싶은 현실은 때때로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포착은 시간을 초월한 채 머리 한 켠에 걸어지는 … 더보기

벙어리 장갑

댓글 0 | 조회 1,715 | 2016.05.26
너는 장갑이 싫다고 했다. 장갑이 왜 싫으냐, 물었더니 장갑은 다섯손가락 모두를 만들어야 해서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갑이 싫은 것이 아니라 장갑을 만들기가 … 더보기

현재 오이

댓글 0 | 조회 1,717 | 2012.11.28
그는 지금 웰링턴에서 가장 바쁘다는, 조그만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12평 남짓한 그 식당엔, 17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일본,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더보기

피곤한 고양이

댓글 0 | 조회 1,726 | 2013.10.08
영화학과 출신이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학시절, 학과 공부는 잘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영화와 관련된 종합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편협하긴 해도- 나름대로 공부… 더보기

칼럼

댓글 0 | 조회 1,735 | 2013.09.24
칼럼. 칼럼이란 것을 쓴 지 1년이 되었다. 그 뜻은 내가 여기 온지 1년이 조금 넘었다는 뜻일 것이다. 2012년 6월 초순, 워킹홀리데이라는 비자로 뉴질랜드로… 더보기

江(Ⅱ)

댓글 0 | 조회 1,746 | 2015.02.11
배에 배럴들을 묶는 법을 확인한 후, N과 나는 대머리 아저씨의 낡은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버스에서는 강 냄새가 났다. 비린 버스였다. 거리를 달리는 동… 더보기

서바이벌

댓글 0 | 조회 1,754 | 2014.02.12
지금은 묻혀버렸지만, 작년 11월쯤 한국의 엠넷에서 작곡가 서바이벌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었다. 티비를 안 보아서 홍보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4회 만에 … 더보기

기대

댓글 0 | 조회 1,776 | 2014.09.24
내가 나에게 갖는 기대가 나를 미치게 한다. 기대는 구름처럼 내 머릿속을 횡횡하고 있었다. 심해 속에 가라앉는 돌덩이처럼 무겁고 무서운 까만 재 같은 것들이 구름… 더보기

한국에서

댓글 0 | 조회 1,792 | 2014.01.30
2년 만에 한국에 다녀왔다. 인천공항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부산스럽지만 깔끔한, 이용자의 동선을 최대한 고려하여 만든 회색빛의 거대한 이동체. 사람들은 세포처럼 … 더보기

모자이크(Ⅲ)

댓글 0 | 조회 1,847 | 2013.12.24
호텔의 방. 창가 태양의 광선이 대기를 통과하고, 산란된 빛의 파장은 곧게 흩어져 호텔의 창가에 곱게 내려앉아있다. 먼지들이 빛의 언저리를 떠돌고, 창틀에 반쯤 … 더보기

江(Ⅷ)

댓글 0 | 조회 1,853 | 2015.07.29
일어났다. 4일 째. 아침. 강 위에서의 마지막 숙박지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제는 중류에서 하류로 접어들고 있었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강의 흐름은 조금씩 조… 더보기

江(Ⅵ)

댓글 0 | 조회 1,869 | 2015.06.24
오후 네 시. 눈을 떴다. 천둥이 치고 있었고, 하늘은 말라있었다. 정말 바짝 마른 파란 하늘 위에 구름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건조하게 붙어있었다. 오래된 페인… 더보기

江(Ⅶ)

댓글 0 | 조회 1,909 | 2015.07.15
짐을 모두 싣고 난 후 우리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강변의 물에 바지를 적셔가며 배에 올랐다. 강 위에서의 3일차. 하루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우리는… 더보기

상류

댓글 0 | 조회 1,917 | 2014.11.26
내가 일하는 곳의 사장은, 돈을 아주 잘 버는 사람이다. 지금하는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과를 나와, 이것저것하며 돈을 모은 뒤 지금은 40명에 가까운 직원을 … 더보기

이사

댓글 0 | 조회 1,930 | 2013.09.10
저번 주였다. 내가 사는 플랫의 인터넷이 일주일 남짓 먹통상태일 때였다. 일주일 내내 플랫메이트들을 볼 때마다 얘기를 했다. 난 인터넷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 더보기

영어

댓글 0 | 조회 1,940 | 2015.01.13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외국인에게 크게 거부감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다른 학원은 거의 다니지 않았지만 영어회화학원만큼은 꾸준히 다녔던 것이 비결 아닌 비… 더보기

작업기(Ⅴ)-패

댓글 0 | 조회 1,952 | 2015.04.30
우선 너무 기쁜 나머지 바로 답 메일을 보냈다. 보낸 답장은 내가 찍었던 단편영화가 첨부된 채였다. 그 의도는 “나는 이러이러하게 쓸모가 있으니 투자 대비 괜찮을… 더보기

운동은 사람을 순수하게 만든다

댓글 0 | 조회 1,957 | 2014.07.08
태어나서 처음으로 근육이란 것을 키워봤다. 펑크에 빠져있던 고등학교 무렵에는 비쩍 마른 몸을 좋아했다. 44사이즈를 입을 수 있는 상체에 디올옴므 모델과도 같은 … 더보기

江(Ⅴ)

댓글 0 | 조회 1,971 | 2015.06.09
다음 날 아침. 아직도 마르지 않은 축축한 항해용(?) 옷을 입고 텐트 밖으로 나와보니, 평상 위에 올려놓았던 종이컵의 밥이 사라졌다. 은박지가 제멋대로 뜯어져 … 더보기

신해철

댓글 0 | 조회 1,985 | 2015.05.13
오랜만에 글을 쓴다. 뭔가 오랜만이라는 느낌이다. 시리즈 아닌 시리즈물을 쓰다보니 어렵다. 분량조절에 실패한 탓에 자꾸 사골처럼 우려먹는 기분이다. 사골은 그래도… 더보기

단편영화를 보는 시간

댓글 0 | 조회 1,994 | 2014.08.13
영화제의 분위기는 항상 나를 매료시킨다. 특히 단편영화 섹션이 그렇다. 상기된 표정의 감독들과 스텝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듯한 표정들. 평소 영… 더보기

거미집(Ⅱ)

댓글 0 | 조회 2,002 | 2016.01.13
<<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누렇게 뜬 천장 구석에, 거미줄이 하나 쳐져 있었다. 거미줄 위에 다리가 긴 거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