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류(李慶流. 1564(명종 1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159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 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조 좌랑으로 출전하여 상주에서 상주판관 권길(權吉)과 함께 전사하였다. 후에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되었다)가 병조좌랑이란 벼슬을 할 때 임진왜란을 맞았는데 그의 둘째 형이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출전자 명단에 이경류로 이름이 잘못 적혀 있었다. 그의 형이 가야 할 사람인 자신이 출전하겠다고 했으나 이경류는 이름이 적힌 자신이 가겠다며 형을 대신하여 출전하였다.
변기라는 방위대장이 진을 치고 적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여 도주하자 이경류는 상주에 진을 치고 있는 이일 장군의 진지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 전세도 크게 불리하였다. 그래서 혼자 적진으로 돌진하여 조선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보려고 진 밖으로 나왔다. 그때 그의 하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울면서 한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렸다. 그러나 이경류는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욕되게 살기를 바라겠느냐며 하인에게 유서를 써서 주며 적진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인이 울며 그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자 하인에게 정성이 기특하여 뜻을 따르겠다며 몹시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얻어다 달라고 하였다. 하인이 기뻐하며 밥을 얻어 오니 이경류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하인은 적진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였고 이경류는 적진으로 돌진하여 왜구 몇 명을 물리치고 전사했다.
하인이 집으로 돌아와 이경류의 전사 소식을 전하니 집안사람들은 슬퍼하며 이경류가 유서 쓴 날을 죽은 날로 삼아 초상을 치렀다. 그 뒤 하인은 목을 매어 죽고, 이경류가 타던 말도 아무 것도 먹지 않다가 따라 죽었다. 사람들은 이경류가 평소 입던 의관을 염하여 장사 지내고 그 아래에 종과 말을 묻어 주었다.
그런데 그 후에 이경류가 밤마다 자기 집을 찾아왔다. 말하는 소리와 웃는 모양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다. 부인 조 씨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음식을 마련하여 두면 마시고 먹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 보면 음식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이경류는 매일 저녁만 되면 와서 닭이 울면 문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부인이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묻자 이경류는 슬프게 울며 허다한 백골 더미 가운데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느냐며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고 했다.
소상(죽은 지 일 년 만에 지내는 제사) 후에 하루걸러 찾아오던 그는 대상(죽은 지 이 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치를 때가 되자 작별 인사를 하며 당시 네 살이던 아들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십 년 후 아들이 급제하여 사당에 절을 하는데 앞으로 맡게 될 벼슬을 알려주는 이경류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들렸다.
그 뒤 이경류의 어머니가 병이 들었는데 귤을 먹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오월이라 귤을 구할 수가 없었다. 며칠 뒤 공중에서 이경류가 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안개 자욱한 하늘에서 귤 세 개가 떨어지며 중국 동정호에서 구한 것이니 어머니께 드리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어머니는 그 귤을 먹고 병이 나았다.
- 동패낙송(東稗洛誦. 조선 후기에 펴낸 것으로 보이는 작자 미상의 한문야담집이다. 2권 2책 속 1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총 56편이 실려 있으며, 작품마다 제목은 없고 각 편의 첫머리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잡록이 섞여 있지 않은 야담집으로 수록된 작품의 구성이 치밀하고 문체가 뛰어나다. 속 1책에 이가환의 친필 글이 실려 있는데 이가환과 작자가 어떤 관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계서야담
송영림: 소설가, 희곡작가, 아동문학가
■ 자료제공: 인간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