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환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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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환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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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 시와 술로 달래던 김윤제의 ‘살롱’
 

한시는 시풍에 따라 당시(唐詩), 송시(宋詩)로 나뉜다. 둘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당시는 가슴으로 쓰고 송시는 머리로 쓴다거나, 당시는 봄 같다 하고 송시는 가을 같다고 한다. 당시는 보여주는 것이며, 송시는 말하는 것이라고 나누기도 한다(정민). 이수광이 ‘지봉유설’에 둘을 분류해 놓은 것을 보면 흥미롭다. 


먼저 당시다. ‘꽃 피자 가지마다 나비 많더니, 꽃 지니 나비는 보이지 않네. 단지 저 옛 둥지의 제비가 있어, 주인이 가난해도 돌아왔구나.’ 화려했던 날들은 가고, 쓸쓸하고 곤궁한 집에 제비 한 마리가 깃들어 위안을 준다. 그 풍경을 그림처럼 보여줄 뿐 시대는 가려져 있다. 


다음은 송시다. ‘한바탕 광풍에 나무가 거꾸러지니, 뽑힌 나무는 뿌리까지 드러났구나. 그 위에 몇 줄기 등나무 넝쿨, 푸릇푸릇 여태도 모르고 있네.’ 한바탕 광풍에 뒤집어진 나무 위에 푸릇푸릇 새순이 났다. 순환하는 자연의 찬미가 아니라 권력주변에 기생하는 모리배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다. 전자는 그림이며, 후자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16세기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이면서 사화당쟁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유학은 붕당의 논리로 변질되었고, 기득권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전락했다. 여기에 염증을 느낀 많은 문인 관료들이 자진 귀향하거나 사화에 연루되어 강제로 중앙을 떠나게 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향촌의 사림문화가 제대로 꽃 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 공간이 호남이며, 무등산의 북쪽 아래 광주와 담양이 나뉘는 창계천 주변, 지금의 가사문학권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수광은 “근래 시인은 대부분 호남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호남십걸’로 박상, 임억령, 임형수, 김인후, 양응정, 박순, 최경창, 백광훈, 임제, 고경명을 들었다. 이 당대의 이름들이 한 꾸러미처럼 등장하는 곳이 ‘환벽당(環碧堂)’이다.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며 조선의 시가문학이 만개한 공간이다. 조선중기 문신 김윤제(1501~1572)가 지었다. 호는 사촌(沙村),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갔다. 나주목사 등 13개 지방관을 역임했다. 부안군수로 있을 때 은퇴한 이에게 새우젓과 생선을 보내주어 고맙다는 대목이 소세양의 문집에 나온다. ‘익산에 가을비가 열흘 넘겨 칼마저 녹이 슬고, 반찬 오른 오이 가지 오래되어 물렸는데, 대소쿠리 성한 생선 멀리서 보내시니, 처자식을 바라보며 내 홀로 자랑하오.’ 선물을 받고는 시 한수 지어 고마움을 남겨두는 것이 멋스럽다. 사촌이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는지가 이런 대목에서 드러난다. 


당시 주자전집은 1백 권이 넘어 선학들이 간행하고 싶어도 엄두를 못 내던 책이었다. 기대승이 주자대전에서 글을 뽑아 주자문록 4책을 엮자 1545년 나주목사로 있던 사촌이 간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김윤제는 을사사화 직후 홀연 은퇴한 뒤 귀향하여 후학에 힘썼다. 환벽당을 지은 것이 그 때다. 



광주시 충효동 창계천이 광주호로 흘러드는 높지막한 언덕 위에 지은 다락집, 푸르른 대숲이 고리를 두르듯이 빙 둘러있다 하여 환벽이다. 이름은 신잠이 짓고, 제액은 송시열이 썼다. 초봄에 기둥들 사이로 드러나는 매화가 일품이다. 축대 아래 큰 배롱나무가 있고 집을 둘러 느티나무, 벽오동, 왕벚나무, 모과나무 같은 고목들이 고아한 정취를 풍긴다. 


사촌의 제자로는 정철과 종질인 김성원이 대표적이다. 정철은 27세에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이곳에서 10여년 머물며 공부했다. 사촌은 정철을 아껴 외손녀 사위로 삼고 관계에 나아갈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정철은 당대의 석학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훗날 가사문학의 대가로 성장하는 자양분을 얻게 된다. 정철은 문학에 있어서는 일가를 이뤘으되, 서인의 우두머리로 정치에 있어서는 비정한 뒷맛을 남기는 인물이다. 


그 무렵 환벽당은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거치면서 시대의식을 함께했던 많은 문인 학자들이 찾는 문학의 산실이 된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살로네, 17세기 프랑스의 살롱과 견줄, 환벽당은 시와 술의 집이었다. 따사로운 봄날, 시문을 사랑하는 이들이 두루 앉아 차운하며 시를 짓거나 울분에 찬 술잔을 기울였을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송순, 임억령, 김인후, 소세양, 양산보, 기대승, 양응정, 김성원, 정철, 고경명, 백광훈 등 호남의 누정시인들이 이곳에 시를 남겼다.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이 각각 20수씩, 80수를 지은 ‘식영정이십영(詠)’은 이 일대의 풍취를 두루 망라한 수작으로 꼽힌다. 서석산의 한가한 구름, 푸른 시내의 흰 물결, 벽오동에 비치는 서늘한 달, 볕바른 언덕에 심은 오이,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 환벽당 아래의 영추, 학마을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배롱나무 꽃 비치는 여울. 시 없이 시제만 모아놓아도 시가 된다. 한가롭고 여유로운 이런 풍경들은 뒷날 성산별곡으로 꽃피게 된다. 이들은 주로 당시를 썼다. 당시는 한번 보면 그저 밋밋하지만, 백자처럼 두고 볼수록 은은한 맛이 있다. 


굽이굽이 안개 낀 시내는 하늘처럼 맑고

(數曲煙溪淸若空 수곡연계청약공)


작은집 한가로운 꿈에 삼베옷 스치는 바람

(小堂閑夢蒲襟風 소당한몽포금풍)


잠깨어 열린 문 내다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覺來開戶無人見 각래개호무인견)


비껴 지는 석양이 뉘엿뉘엿 물속에 어리누나

(斜日離離映水中 사일리리영수중)


백광훈의 ‘환벽당’ 이라는 시다. 그는 송시를 버리고 당시를 썼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사람이다. 시인은 더 말하지 않는다. 물과 바람과 낮잠, 그리고 홀로 물에 비친 석양을 바라볼 뿐. 시대를 탓하며, 남풍이 그리워 마루에 누웠더니 발이 북향하고 뻗었구나, 하는 저항의 메시지가 없다. 찻물에 향색이 퍼지듯 은은하게, 탈속과 청정과 고독이 우러난다. 당시 당송 시비가 꽤나 심각했던 모양인데, 그들은 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 안에서 스스로 그림이 되어 은유 속으로 숨어버리고는 짐짓 모른 체 한다. 때가 그랬을 것이다. 을사사화(1545)와 기축옥사(1589) 사이, 항차 1천여 명이 도륙 당하는 이 착란의 시대에 한 조각 글은 자칫 멸족의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쓰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송시보다는 당시가 지혜롭다. 백광훈의 시는 ‘I see you’라 하듯이, 입으로 말하지 않고 눈으로 말하는, 당시 환벽당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이 문학의 산실이 된 데에는 김윤제의 넉넉함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나이로는 송순이 좌장이고, 임억령에 이어 김윤제가 많다. 그는 이만석의 대지주이자 부호였고, 그의 땅이 하도 넓어 평매들이 아스라이 보이는 곳까지였다고 한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자존심 하나로 사는 시인묵객들이 찾지는 않는 것이고 보면, 그는 나눔을 아는 꽤나 인(仁)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문집이 남아있지 않아 세세한 것은 알 수 없으되,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환벽당의 주인이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빛난다. 그를 배향하는 서원이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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