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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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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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 앞에는 유치원 앙처럼 이름표를 단 꽃모종이 열 지어 있었다. 그 중 ‘풍로초’라는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종종한 잎이 무성해져 줄기도 보이지 않는 야생화였다. 꽃을 키운다고 하기가 미안할 정도다. 꽃대를 올리고 꽃잎을 밀어내고, 줄기를 옆으로 낼 것인지 말 것인지 꽃 저 혼자 다 알아서 하고 있다. 나는 그냥 간간이 물이나 주고, 베란다창을 열었다 닫았다만 해준다. 그리고 기특한 그 모습에 반해 아침마다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동안 지켜볼 뿐이다.

  


 

풍로라는 것은 불을 지피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던 그 옛날의 수동식 선풍기가 아닌가. 화덕 아래에 뚤린 구멍에다 풍로를 들이대 놓고 세게 돌리면 한순간 불쏘시개에 불꽃이 일면서 재어둔 숯에 빨갛게 불이 옮겨 붙었다. 같은 뜻은 아니겠지만 그 옛날 풍로처럼 꽃을 화르르 잘 피워낼 듯한 느낌이 들어 모종을 세 개나 샀다.

 

큼직한 토분에다 한꺼번에 심어주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더니, 차츰 저희들끼리도 서로가 궁금해졌는지 목을 빼들고 주위를 살피는 듯하였다. 선듯 불어오는 바람을 핑계삼아 다른 잎을 슬쩍슬쩍 밀기도 하고 옆에 있는 줄기의 발등을 툭툭건드리며 어느새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고것들이 사랑스러워서 자꾸만 그 앞에 다가앉고 싶었다.

 

어느 날 꽃망울이 보인다 싶더니만 마치 풍로를 돌린 듯 한꺼번에 꽃불이 일기 시작했다. 햇살, 바람, 흙이 예전 같지 않았을 텐데도 한결같이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오만스런 타박쟁이인가. 어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면 늘 무슨‘탓’으로 돌렸다. 나 자신의 능력과 인내심을 반성하기보다는 운이 나빠서, 돈이 없어서, 사람을 잘못 만나서 등등, 꽃으로 해서 얻은 귀한 깨달음이었다.

 

가끔 지인들이 전화를 걸어와 어찌 지내느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게 쓸쓸하다는 말부터 하게 된다. 쓸쓸해 하는 것이 마치 나의 일상인 것처럼.

 

‘쓸쓸’ 이라는 말은 모양까지도 쓸쓸해 보인다. 시옷이 네 개다. 한곳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치마폭을 펄럭이며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이 내 모습이라면 아쉬울 것 같았다. 나 자신의 엠블럼(emblem: 상징, 표상)은 정적인 이미지였으면 싶었다. 조용하면서도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정종동의 모습이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런 이미지는 꽃과 나무에서 배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 식물을 기르는 것은 동물을 기르는 것보다 훨씬 마음 편한 일이다. 두 발이나 네 발 달린 것들은 제 맘대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자식은 물론이고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면서 제때 제자리에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며 식물은 아주 온순하다.

 

제자리에 앉아 조용히 꽃을 피우거나 잎을 내던가 하고, 기껏해야 창 밖을 내다보는 정도다. 내가 외출에서 돌아올 때도 강아지는 나를 보는 순간 겅중겅중 뛰고, 내 다리를 핥고 기어오르고 난리인 데 반해, 화분에 담긴 식물들은 내가 없는 동안 집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하며 다정한 눈빛을 보내올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화분에다 식물을 기르는 게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식물을 겉보기로 대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루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만 사상의학이 있는 게 아니다. 식물은 식물대로 그것이 좋아하는 자리가 있으며, 먹고 싶은 물의 양과 거름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양지식물을 음지에 갔다 놓으면 곧 생기를 잃게 되고, 음지식물을 양지에 오래 두면 더위를 먹어 이내 잎이 타들어 가게 된다. 아이비(Ivy)는 물을 충분히 잘 주어야 잘 자란다.

 

기르는 사람은 여러 개의 눈과 손을, 또 부지런한 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정하게 바라보는 눈뿐만 아니라 아픔을 살피는 눈, 원하는 그것을 짐작해 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또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손과 함께, 잘못 자란 부분을 과감하게 걷어내는 손도 필요하다. 눈과 손이 여럿 있다고 해도 제때 움직여 주는 발이 없다면 그 또한 안 될 일이다.

 

많은 화분 중에서 유난히 풍로초에 마음이 쓰인다. 줄기가 제일 가늘고 꽃도 `가날프지만, 그보다는 그것이 야생화이기 때문이다. 야생화란 두터운 햇살 속에서 바람과 자유로이 만나면서 또 땅속 지하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자라온 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아파트 14층 베란다에다 옮겨두었으니 어찌될까 싶어 내내 마음이 쓰였다.

 

내 걱정과는 달리 풍로초는 아주 열심히 줄기를 내고 꽃을 피워댔다. 화분 가장자리를 넘어와 베란다 바닥에 아예 저만의 꽃밭을 만들 정도다. 작은 꽃잎 다섯 장에 하늘을 받쳐들고 있기라도 한 듯 꽃대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꽃잎이 벙그는 모습 또한 너무나 천진스러워 꽃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겨우 내 엄지손톱 만한 꽃을 피우면서도 풍로초는 우리 집에서 가장 부지런하다.

 

꽃에서 어떤 열정이 느껴진다. 풍로초는 쉴 새 없이 풍로를 돌리고 있는 걸까. 뻗어 나가는 줄기는 생기로 가득 차 있고, 몽실몽실한 꽃망울에서는 아침을 기다리는 예비 꽃들의 심호흡 소리가 드리는 듯하다. 풍로초는 이래저래 신나 보인다. 피울 게 있기 때문이다. 나이 삶에도 과연 피울 게 있기나 한지, 만일 있다면 어떤 형상인지 궁금해진다.

 

꽃을 보고 있으니 꽃도 나를 빤히 쳐다본다. 너는 왜 꽃을 피우지 않느냐고 묻는 듯하다. 대답이 없는 내게 꽃은 다시 말할 것 같다. 이 세상에 준비 없이 피울 수 있는 꽃은 한 송이도 없는 거라고.

내 삶에 있어서 무언가 피워낼 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잎이면 어떻고, 꽃이면 어떤가. 또 꽃잎이 다섯 장이면 어떻고, 여섯 장이면 또 어떤가. 피워내기 위해 성실히 준비하는 삶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게 아닐까 싶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하늘이 너무 높아 보일 때, 그리고 조금씩 쓸쓸해지려고 할 때 나는 풍로초를 찾는다. 어쩌면 꽃잎 하나하나가 작은 풍로가 되어 내 가슴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수필세계] 발췌

■ 정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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