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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0 개 1,738 김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도시를 이야기 할때 빼 놓지 않고 언급하는 미국의 한 도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도시, 뉴욕입니다. 누구나 이 멋지고 풍요로운 도시에 발 붙이고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스스로를 ‘뉴요커’라 부르며 뿌듯해 한다는 세계문화의 중심지 이기도 하지요.

‘뉴요커’는 말 그대로 뉴욕사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지리적인 거주지나 생활반경이 뉴욕이라 해서 모두 뉴요커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하는군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뉴욕이라는 동네이름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수식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직업이나 연봉, 그리고 패션감각이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좋은 직업이나 높은 연봉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패션감각 만큼은 타고나는 것이라서 배운다고 될 일도 아니고 또 배웠다고 다 써먹을수 있는것도 아니지요. 옆 사무실 누군가가 쫘악 빼 입은 고급정장을 내가 똑같이 걸친다고 해서 그 맵시가 제대로 살아날지는 미지수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본판 불변의 법칙은 뉴요커가 되는 길에 도사린 복병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무리 마땅찮은 패션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도 당장에 ‘패피(패션피플)’의 반열에 올라설수 있게 하는 마법의 아이템이 하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비싸지도 않고 외모를 가리지도 않는 기적의 아이템, 바로 스타벅스 커피 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커피 컵이라 할 수 있겠지요.

 


 

시원하게 주욱 빠진 하얀 몸매에 단순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 녹색 로고 하나만 달랑 새겨진 종이컵과, 그 동안 배불뚝이 아저씨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스뎅-플라스틱 머그잔을 Hot한 패션아이템으로 재탄생시킨 텀블러는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쳐다 본 사람은 없다는 기적의 아이템입니다. 스타벅스 종이컵이 가진 디자인파워는 낡은 옷으로 온 몸을 두른 중년남자의 ‘가난뱅이’ 생존 패션을 물질만능주의에 반항하는 시대적 선각자의 ‘그런지룩’으로 변모시켰고, 끝까지 꼭꼭 채운 셔츠단추에 두꺼운 안경을 꽈악 눌러 쓴 답답이 패션을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그룹의 ‘비즈니스룩’ 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달랑 컵 하나 들고 홀짝거릴 뿐인데 사람들 보는 시선이 달라진듯한 ‘느낌스러운 느낌’은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시작한 스타벅스는 도무지 끊을수가 없는 마성의 뉴요커아이템으로 등극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999년, 처음으로 스타벅스가 한국에 상륙했을때.. 뉴욕은 커녕 미국 대사관 정문도 넘어서보지 못한 일반인들 마저도 ‘뉴요커’ 따라하기의 필수아이템인 스타벅스컵 들고 다니기에 열광하게 됩니다. 특히 국내 1호점인 ‘이대점’ 인근에는 손에 손에 하얀 종이컵을 들고있는 여대생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어 ‘손에 손잡고’가 아니라 ‘손에 컵잡고’의 장관을 연출했다 하지요.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부유한 집안의 예쁜 언니들이나 홀짝이던 미국커피는 점점 대중화되고 일반화 되어서 대한민국 다방커피의 종식을 야기했고 대한민국 커피값의 극적인 인상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대한민국 ‘서울러’들을 단숨에 변두리 뉴요커로 ‘격상’시킨 스타벅스, 정확히는 ‘종이컵’에 머무르는 시선이 곱기만 했던것은 아닙니다. ‘근검절약’이라는 사자성어를 컴퓨터게임 삼국지에 나오는 ‘가까이 있는 검을 잡고 절에가서 묘약을 찾아라’ 라는 명령어 정도로 알고있는 젊은 세대의 철없는 허영심을 자극하는 아이템이라며 비난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방송사에서 스타벅스 커피에 대한 실험을 하고 그 결과와 인터뷰를 9시 뉴스에 방영하게 되는데요.. 만약 이 뉴스가 2019년에 그대로 방송된다면 아마 방송사는 스타벅스와의 법정공방으로 큰 몸살을 앓았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피 실험자는 예의 그 길고 맵시나는 종이컵이나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젊은이들이었고 실험 내용은 흔히 말하는 Blind test였습니다. 이미 스타벅스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선입견에 푹 빠진 청춘남녀에게 일반 종이컵에 담긴 스타벅스 커피와 인근 트럭카페에서 파는 초저렴 커피를 건네준 후 더 맛있는 커피를 선택하게 하는 테스트였죠. 실험대상이 된 젊은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입맛을 장담했습니다. 세계적인 트렌드인 스타벅스 커피의 맛을 그따위 싸구려 커피가 따라올리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참 재미 있었습니다. 100여명이 참여한 테스트에서 스타벅스를 선택한 사람이 반, 그 반대가 반.. 한마디로 커피맛은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었죠. 그 동안 멋드러진 종이컵으로 ‘유사품 뉴요커’의 삶을 누려왔건만 정작 그 컵에 담겨있던 내용물은 주변의 흔하디 흔한 다방커피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깨달음에 많은 젊은이들이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약간 혀 꼬부라지는 말투로 뉴욕에서 3개월간 어학연수를 할 때부터 1년이 넘게 매일 스타벅스를 마셔왔으니 자신의 혀가 그 맛을 모를리가 없다며 기염을 토했던 젊은 처자는, 자신의 선택이 당시 500원하던 트럭커피라는 것을 알게된 후 당황해서 손발을 저어가며 현실부정을 하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꼬여있던 혀가 풀려 한국어 발음이 정확해지는 기적을 보여주어서 많은 시청자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데 사실 이런 결과를 도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실험을 구상했을테니.. 아마 기성세대에겐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행태가 그 정도로 못마땅했었나 봅니다. 저 역시 방송을 접하며 속이 좀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았으니 아마 그 나이에 일찍이 아저씨의 대열에 서 있었던듯 합니다만... ㅎㅎ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시대의 유행에 뒤쳐지지 않고 싶어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능하면 최첨단 유행을 선도하며 자신의 앞선 감각을 뽐내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지사 입니다. 사정이 정 여의치 않다해도 최소한 구닥다리 촌놈이라는 소리만은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사람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애나 어른이나 동일한 듯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우리의 아이들은 가끔 터무니없는‘아이템’을 손에 들고 자신의 우월성을 뽐내보려 시도하기도 합니다. 

R은 오클랜드 중심부에 위치한 한 공립학교에 다니던 남학생이었습니다. 훤칠한 키에 피부도 깨끗했고 어딘가 이지적인 느낌을 주는 자~알 생긴 어린 청년이었지요. 얼굴이 곱상하고 성적이 좋아서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학교에서 한 주먹했었다는...

 

하여간에 R과의 첫 만남은 참으로 순조로웠습니다. 언행도 반듯했고 머리도 총명한듯 했고 무엇보다도 과학상식이 풍부해서 어떠한 주제로 이야기를 던져도 척척 받아내는 것이 여간내기가 아닌듯 했습니다. 게다가 그 열정적인 몰입이라니.. 

상담을 마친 다음주부터 우리는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그에 덧붙인 교육스케쥴을 마음에 담고 R을 대하니 수업 또한 활기있고 재미있을 밖에요. 거기에다 R이 던져대는 질문의 수준이 고등학생 교과내용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어서 수업시간의 절반은 현대과학의 여러가지 성과에 대해 토론하며 연구할 정도 였지요.   

참으로 즐겁게 수업을 하며 몇 개월을 지냈고 드디어 중간고사를 치를 시점이 되었습니다. R은 당연히 시험결과를 자신있어 했고 저 또한 그의 호언장담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정규교과내용을 훨씬 상회하는 지식을 보유한 R이 학교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텀브레이크를 끝내고 R이 보여준 성적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아니, 예상외로 만족스럽지 않은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학교에서 배정된 상위클라스에 걸맞는 점수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업는 수준이었죠. 

저는 당혹스러웠고 R은 미안해 했으며 R의 부모님들은 우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점수를 앞에 놓고 앉아서, 분명히 실수려니.. 너무 큰 실수를 해서 한 두 문제를 통째로 날려버렸으려니 짐작하며 속을 달랠밖에요. 그리고는 앞으로 수업시간에 과학 전분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성적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집중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업방향을 전환하고나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만나기 이전 R의 학습습관이 어떻게 잘못되어 있었는지, 그가 주변 친구들에게 ‘천재’라고 불려왔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잘못 설정된 학습방향과 주변의 철없는 동경과 칭찬이 어우러져 어떤 결과를 야기해 왔는지...  

그렇습니다. R은 어떠한 공상에 빠져있었던듯 했습니다. 그 공상속에서 자신은 제대로 된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 스스로의 재능을 발현하지 못하고 있는 불운한 천재였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저급한 내용들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엔 너무도 낮은 수준이어서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들 이었습니다. R의 부모님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셨고 많이 우려하고 계셨지만 워낙에 똑똑한 아이가 자신있게 주장을 해대니 별 수 없이 그런가보다.. 하며 넘어갈수 밖에 없었다 하셨습니다. 

책꽃이에 빽빽히 꽃힌 각종 과학 저널들과 과학교양서적들.. 그가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달달 외워댔던 대학교재의 정의와 해설들.. 이해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적용할 수도 없는 도표와 그래프를 끄적거리며 친구들의 주목을 끌던 낭비된 시간들..

이것들은 어쩌면 R의 손에 들리웠던 매끈한 스타벅스커피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맛이나 성분은 거기서 거기이지만 다른 커피들보다 두 세배 더 비싼 몸값을 요구할 수 있던 유일한 근거인 그 잘 빠진 종이컵에 R 자신도 속고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1년 뒤, 

 

R은 목표하던 해외의 한 대학에 원서를 제출했고 한달 여름이 지나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R의 손에 들여있던 것은 더 이상 매끈하고 하얀 스타벅스 종이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일 년간 바탕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온 정성을 들여 빚고 구워서 만들어 낸 R만의 머그였습니다. 당연히 그 안에 담겨있던 커피 또한 R만의 비법으로 뽑아낸 향기 가득한 명품이었지요.

2019년의 첫번째 텀을 지내고 있는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멋있고 싶습니다. 잘나 보이고 싶고 인기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살짝 무리인듯 싶더라도 어려운 책을 옆에 끼고다니기도 하고 언감생심 바라보지도 못할 대학교를 운운하며 목에 힘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올 해에는 조금은 더 스스로에게 정직하면 어떨까요.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아는 것은 아는 것인데, 그 중간쯤 어딘가에서 방황하지 말고 솔직한 선을 그어 자리를 매김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양만 얄쌍한 종이컵대신 투박해도 튼실한 머그를 손에 드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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