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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 타고 온 가을 선물

0 개 1,602 오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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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었다. 

나른하게 지쳐가는 몸을 추스르러 한국에 나갔다. 

좋은 보약 준비해 놓겠다는 딸애의 보챔도 한 몫을 하긴 했지만 그동안 여기서 못 먹었던 입에 맞는 음식들을 찾아먹고 싶었다.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눈으로 보면 땡기리라 믿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달려가는 길. 동네 입구에 들어서니 울긋불긋 과일가게 진열대가 화사했다. 

 

그 한켠에 보라색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포도 였다. 

 

아... 지금이 포도의 계절이구나! 갑자기 입안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있던 식욕이 무섭게 꿈틀대는걸 의식했다. 

 

실로 오랫만에 느껴보는 이변이었다. 과일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도. 그 상큼한 포도알을 얼른 입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온갖 먹거리로 요란스러운 간판들을 지나쳐 왔지만 반응이 없었는데...

 

문득 내 몸에 맞는 보약을 벌써 반쯤은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가웠다. 

 

이심전심이랄까. 집에 도착하니 큰  딤채안에 포도가 그득했다. 오래 헤어져 살았어도 엄마가 포도 좋아하는 걸 잊지않고 기억해 준 딸이 고마웠다. 

 

“그런걸 잊고 살면 엄마 딸이 아니죠....” 

 

부모 자식이란 끈끈한 연결이 이런 것이구나. 가슴이 뭉클했다. 

 

매일아침 눈만 뜨면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탱글탱글한 포도알이 입안에서 씹히는 순간 상큼한 기분으로 머리가 맑아졌다. 축 쳐져가던 어깨에 힘이 생기는 것도 같아서 늘 아침이 상쾌했다. 

 

거침없이 한송이 뚝딱 먹어치우면 정신이 번쩍들었다. 내가 긴 세월 살아온 땅에서 열매맺은 입에 딱 맞는 포도. 내 몸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거였어. ‘신토불이’

 

알맞게 신맛에 단맛이 조화로운 상콤함이라고 해야하나. 간을 잘 맞춘 음식처럼 감칠맛이 여간 아니다. 

 

농사도 어찌 그리 알차게 잘 지었는지... 빈틈없이 촘촘하게 박힌 알이 하나도 허튼게 없다.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든가.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유혹하는 당당함이 너무나 당연했다. 

 

여기도 포도는 사시사철로 지천이다. 미국이나 호주에서 수확한 수입산이 어느 마트에나 쌓여있다. 

 

가끔씩 먹고싶어 사 먹어보면 늘 실망이다. 마치 간이 없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닝닝하다. 당도도 물론 떨어지지만 뭔가가 1% 모자란듯 확실하지가 않다. 시면 시든가 달면 달던가 어정쩡하니 감칠 맛이 없다. 

 

한참 전의 일이었다. 

 

핸더슨쪽 어느 농장으로 우리품종 포도를 사러 간 적이 있었다. 여기에 그게 있다는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여럿이서 달려갔다. 

 

일손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본인들이 직접 들어가서 따 오라며 가위 하나씩을 내줬다. 대단히 큰 농장임에도 그 포도는 딱 두 고랑 뿐이었다. 

 

왜 그건 조금만 심는지? 무슨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다른 포도보다 짙은 보라색으로 탐스러움을 뽑내고 있었다. 

 

마치 저들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반기는듯 몸 자랑이라도 하는걸까? 

 

공짜도 아니건만 모두들 욕심을 부려 큰 그릇을 채웠다. 값이 만만치 않았다. 먹을 만큼씩만 사고 남는 것은 일손 도와준 걸로 만족해야 했다. 

 

얼마 지나서 다시 갔을땐 벌써 끝이 나고 없었다. 그 맛을 아는 사람들이 우리 코리안 말고도 또 있었나보다. 

 

고국에서 포도수입이 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지금 우리 포도와는 맛의 차이가 많이 달랐다고 생각된다.

 

여기는 지금 봄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벗꽃보다 한걸음 뒤늦은 복사꽃이 아름답다. 요즘 한국 마트에 가보면 ‘포도의 계절’ 고국의 가을 냄새가 풍성하다. 

 

한 손으로 들기조차 무거운 황금같이 노오란 배. 오고가는 과일상자에 추석명절이 담겨있다. 

 

둘러앉아 송편빚을 형편은 못 되어도 한가위 정서가 물씬 풍겨나는 풍경이다. 엊그제 가까운 중국마트에서 그 포도를 발견했다. 일부러 멀리 안 가고도 사 먹을 수 있도록 나를 위함인 것 같아 너무 반가웠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일까? 값도 의외로 한국마트보다 쌌다. 있다는 것 만으로도 고마운데 값까지 싸니 횡재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애기다루듯 곱게 다뤄야 하는 걸 마구 만져놓은게 틀림없다. 튼실한 송이가 많이 흩어져 있어 신선함이 덜했다. 

 

선물용도 아니고 나 혼자 먹을 것이니 별 문제는 없었다. 그 맛이야 다를바가 없다. 

 

근래 한국의 과일들 맛과 질이 대단히 우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과학적인 기술의 성과일 것이다. 딸기나 참외같은 것들도 그 맛이 전 에 먹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가끔씩 고국행에 밥보다 과일에 더 매달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입이 즐거워 행복한 순간들. 모든 과일들이 수입이 돼서 여기서 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목마를 때나 입안이 쓸 때. 조금씩 나눠 먹으니 너무좋다. 여기 계절이 바뀌어도 고국의 가을만은 길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포도가 내 좋은 입맛 친구로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기에... 

 

옛날에는 포도가 끝물일 때, 몇 짝씩 들여왔다. 다른 사람들은 포도주를 담갔지만 난 원액을 만들어 병에 저장했다. 술보다 순수하고 강한 포도향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하얀눈이 싸락싸락 내리는 날. 마알간 유리잔에 포도쥬스를 따랐다. 빛깔이 너무 고와 단번에 마셔버리기가 아까웠다. 

 

창 너머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잔을 비웠다. 얼었던 몸이 따뜻해져 오는 훗훗함을 느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잔잔한 행복감이었으리.                    

 

일찌감치 혼자 살아온 내 정서가 바로 그런거였나보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야릇한 향취속에서 낙엽따라 가버린 계절처럼 멀리 떠나간 사람들을 곧잘 생각해 내곤했었다. 

 

아득한 옛날 일이 돼버린 그 어떤 그림이 떠오르기도 했다. 

 

누구하나 기댈사람 없는 삼팔 따라지 초라한 문학도. 그와 연애하던 시절이었다. 모처럼 소사 포도밭에 놀러 갔을 때다. 포도넝쿨 얼크러진 속에 그를 들여 보냈다. 의아해 하는 그에게 가방 안에 넣어간 새 바지를 갈아입으라고 주었다. 

 

“그 때 당신 참 따뜻했어...” 

고맙다고는 끝내 말을 안했다. 남자의 마지막 지키고 싶은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가끔씩 그 때 일을 회상하며 옛날 앨범을 펼쳤다. 서로가 힘들 때 좋은 위안이 되었다.

 

지금의 내 삶은 낭만도 멋도 없다. 빈 껍데기 영혼조차 잃고 오직 본능으로만 사는 것 같아 안쓰럽다. 

 

봄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앞집 화분에 달랑 한포기 심기운 딸기가 매일 조금씩 빨개지고 있다. 재미있다. 이제부터 그라스에 빠알간 딸기쥬스를 따라볼까나 잃었던 낭만을 되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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