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과 검정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한일수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천미란
성태용
조기조
김성국
템플스테이
최성길
강승민
크리스틴 강
정동희
에이다
골프&인생
이경자
Kevin Kim
정윤성
웬트워스
조성현
전정훈
Mystery
커넥터
Roy Kim
차자명
권레오
독자기고
새움터
김준
박기태
수선재
김도형
마이클 킴

파랑과 검정

0 개 2,962 박지원

인식이 색깔을 바꾼다.

 

아주 어렸을 때, 내게는 스물네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던 크레파스가 있었다. 그 중 몇 개의 색깔을 닳도록 사용하고는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파란색이었다. 내 작은 기억들에 의존하자면, 나는 바다 혹은 강을 그렸던 적이 많았다. 바다는 보통 바다 속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 스케치북의 반 이상이 파란색으로 도배되곤 했다. 

 

그렇게 크레파스 끝이 맨들맨들 해지도록 하얀 스케치북 위를 칠하던 시절을 지나, 파란색은 어느 순간부터 공포를 상징하는 색으로 인식되어갔다. 귀신이나 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TV 속에서 공포감을 표현할 때마다 파란 조명을 쓰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보통 눈동자가 없고, 왼쪽 화면 구석에 진한 명조체로 “재연”이라 적혀있었던 많은 프로그램들 전부, 파란색을 조명으로 썼었다. 파란색은 무엇인가 섬뜩함, 싸한 느낌을 만들 수 있구나, 를 어린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 후의 파란색은 조금씩 흐려져 갔다. 어느 책에선가 파란색이 불가능을 상징하는 색이라는 것을 듣고는 불가능이 주는 신비감에 관해 잠깐 생각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외국 락 음악에서 등장하는 “Blue”가 우울함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모든 색들이 그렇지만, 파란색은 내 인식의 저변이 가장 많이 이동했던 색일 것이다. 마치 파란 바다 속을 유영하는 고래처럼. 시간과 시간이 만나 시간이 지나는 시간들 틈틈에 어딘가의 빛처럼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느낌이, 나에게 있어 지금의 파란색이 된 것이다.

 

검정색은 조금 다른 경우다.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자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검정색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없었다. 큰 고래를 온통 새까맣게 칠하기도 했고, 당시 보던 NBA 의 광경을 그릴 때는 사람들을 전부 까맣게 그렸다. (실제로 어린 내 눈에 그들은 모두 그저 까맣게 보였을 것이다) 

열일곱 열여덟. 고딕펑크 패션에 빠졌던 이후로는 온통 시꺼멓게 입고 다녔다. 심지어 담배도 까만색 담배를 피웠을 정도로 허세 넘쳤던 그 때는, 검은색은 쿨함의 상징이었다. 검은색은 나를 드러내는 색이자 가장 드러내지 않는 색이었고, 마치 요란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같지만 그저 그림자일 뿐인, 그 때 내 심정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하는 색이었다. 

 

그 후, 존경하는 영화감독 김기덕이 했던 이 말이 내 검은색의 세계관을 바꾼다. 

 

“흰색과 검은 색은 같은 색이다. 모든 것은 서로 바라봄으로써 존재한다. 흰 색이라는 말이 없으면 검은 색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낮과 밤, 흑과 백, 플러스와 마이너스… 이 모든 것은 ‘존재하는 서로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흰색과 검은 색은 같은 색이다.”  

 

물론 흰색과 검은색 또한 그 색을 말할 것이 아닌 은유적 표현을 위한 도구이겠지만, 근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하는 서로의 에너지라니. 김기덕 감독의 이 말은 내 세계관 중 하나의 줄기로 자리잡았고, 결국 인식 자체가 색깔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수능 때 공부했던 소설 <소나기>의 보라색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인식 자체가 색깔이며, 그 색깔은 스스로가 정의내릴 수 있고 보는 사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색깔이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색깔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수많은 환경들을 지나치며 마침내는 파란색이, 내게는 피상적이 아닌 본질적 심상의 컬러로서 자리한 것처럼. 모든 색깔들이 그렇게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내게는 검은색이(어쩌면 김기덕 감독이) 가르쳐준 것이다. 

 

쓸데없는 거 정의내리기 좋아하는 꼰대 철학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색깔”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을 조금 더 어린 시절에 했으면 더 좋았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색깔에 대한 강박 혹은 편견 없이, 여러가지 색깔로 내 위를 덧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시간을 걸어나오면 -이 강박으로 인해- 이 길까지 걸어오며 낭비하고 버렸던 색깔들이 지금의 내게는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결국 흑과 백은 같은 색인 것을.  

 

11 Great Walks 600여km, 풍광을 카메라에 담다

댓글 0 | 조회 459 | 15시간전
1993년, 낯선 땅 뉴질랜드(New Zealand)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이 나라의 자연이 내 삶 깊숙이 스며들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 환경… 더보기

추파카브라 전설

댓글 0 | 조회 129 | 15시간전
— 공포와 현실 사이, 인간이 만들어낸 괴물의 이야기1990년대 중반, 푸에르토리코의 한 농촌 마을에서 시작된 이상한 사건이 있었다. 아침이 되자 농장의 염소와 … 더보기

뜰안의 민들레 꽃처럼 . . .

댓글 0 | 조회 143 | 16시간전
달게 잘 잤는데도 깨어나면 기분이 깔끔하지가 않다. 나만 그런가해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거의가 다 비슷했다.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인가?어쨌든 또 하… 더보기

마지막 퍼팅의 압박 – 중요한 순간에 집중하는 법

댓글 0 | 조회 183 | 16시간전
골프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라운드 내내 아무리 좋은 샷을 해도, 마지막 퍼팅 하나로 모든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1미터, 아니 50cm 퍼… 더보기

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

댓글 0 | 조회 108 | 16시간전
시인 문정희내가 세상을 안다고 생각할 때얼마나 모르고 있는지그때 나는 별을 바라본다.별은 그저 멀리서 꿈틀거리는 벌레이거나아무 의도도 없이 나를 가로막는 돌처럼나… 더보기

뉴질랜드 이민 삶 44년을 회고하며

댓글 0 | 조회 603 | 16시간전
1982년, 키위 구두약의 나라 뉴질랜드에 첫발을 내딛다내 글의 변(辨): 나의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하며 이 글은 44년 뉴질랜드 이민사의 흔적 단면을 기록한 것… 더보기

뉴질랜드 입법부&행정부와 사법부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댓글 0 | 조회 401 | 22시간전
예전에 한국의 계엄령 관련 칼럼을 다루면서, 뉴질랜드는 완전한 삼권분립이 되지 않는다는 주제도 잠깐 다룬 적이 있습니다. 뉴질랜드는 일단 3년마다의 선거를 통해 … 더보기

궁극적으로 괴로움을 없애는 유일한 길

댓글 0 | 조회 252 | 22시간전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비 오는 조계사를 바라본다. 시내를 오가다 보면 불교신자든 아니든 한 번쯤 들르게 되는 활기를 가진 절이다. 한동안은 절 마당… 더보기

25. 마우이와 태양을 붙잡은 산 – 기스본의 전설

댓글 0 | 조회 86 | 22시간전
기스본(Gisborne)은 뉴질랜드 북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로,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땅”으로 알려져 있다.이곳은 마오리 부족인 Ngati Porou… 더보기

매력만점의 은퇴부모 투자이민

댓글 0 | 조회 778 | 2일전
COVID-19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특별 영주권제도를 통하여 영주권을 받게 된 분들로부터 근래 들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제가 코로나로 영주권… 더보기

호주 뉴질랜드 의대 합격의 분기점: 지금 점검해야 할 시기

댓글 0 | 조회 452 | 2일전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 AI안녕하세요? 뉴질랜드, 호주 의치약대 유학, 입시 및 중고등학교 내신관리 전문 컨설턴트 크리스틴입니다. 현재 유학생… 더보기

연주 씨의 카드

댓글 0 | 조회 251 | 2일전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지적 장애를 가진 연주 씨는 부모와 함께예배에 한 번도 빠짐이 없는 아가씨입니다연주 씨네 집이 이사하여 심방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성탄절이 가… 더보기

2026년 통과된 고용관계법 개정안

댓글 0 | 조회 294 | 2일전
고용시장의 유연성을 증가시키고 피고용인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고용분쟁 시스템 구조를 더 공정하게 만들고, 피고용인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 더보기

‘취미’와 ‘문제’의 경계선

댓글 0 | 조회 129 | 2일전
- 갬블링 위험 신호 점검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갬블링은 생각보다 가까운 여가 활동이다. 주말에 친구들과 스포츠 결과를 예측하거나 여행 중 카지노를 방문하… 더보기

개똥걱정 말똥걱정

댓글 0 | 조회 112 | 2일전
1898년 뉴욕에서 세계 최초의 국제 도시계획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전 세계의 전문가들이 모였음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 산업이 발달하고 물동량이 늘어나자 말(馬… 더보기

6편 – MH370: 사라진 하늘

댓글 0 | 조회 110 | 2일전
“비행기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있던 ‘어떤 것’은… 여전히 살아 있다.”프롤로그 - 2014년 3월 8일, 새벽 1시 21분쿠알라룸푸르 관제탑.레이더 화면에서 … 더보기

오클랜드대 각 의료계열 최신 입시 정보 및 선발기준 (의대, 약대, 검안대, 영상…

댓글 0 | 조회 218 | 2일전
이번 칼럼에서는 오클랜드대 각 의료계열 최신 입시 정보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아래는 2026년 오클랜드 의료계열 입시 기준 Dean’s Determinati… 더보기

병보다 무서운 간병비

댓글 0 | 조회 795 | 5일전
고려 말기의 명장인 이성계(李成桂)가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래 1910년 멸망할 때까지 518년 동안 조선은 총 27명의 왕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 … 더보기

오클랜드대 의료계열 입시 통계 총정리 (의대 약대 검안대 등)

댓글 0 | 조회 459 | 7일전
이번 칼럼에서는 최근 2년 (2025년, 2026년) 오클랜드대 의료계열 입시 통계를 요약해보고자 한다. 2026년 입시는 2025년 지원한 학생들을 뜻하며 20… 더보기

약 처방, 이제는 12개월분까지 처방 받을 수 있다

댓글 0 | 조회 994 | 10일전

올해부터 바뀌는 오클랜드대 의료계열 MMI 면접방식 (의대,약대,검안대 등)

댓글 0 | 조회 828 | 2026.03.12
의료계열 (메디컬)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최신 정보’를 알고 정확하게 준비를 하는것이다. 필자는 매년 면접관과 입학사정관을 만나며 최신정보를 수… 더보기

피아노의 영혼

댓글 0 | 조회 258 | 2026.03.11
▲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 AI1994년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하면서 마침 딸의 권고로 뉴질랜드 영화 ‘피아노(The Piano)’를 감상하였다. … 더보기

인간의 본질적 문제

댓글 0 | 조회 212 | 2026.03.11
저는 불교의 윤회설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윤회할 주체인 “나”라는 게 일단 본질적 의미에 존재하지 않으며, “나”라는, 인간의 뇌가 만들어내는 인식이 죽… 더보기

히말라야의 그림자 빅풋과 예티는 존재하는가

댓글 0 | 조회 177 | 2026.03.11
어느 겨울밤,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에서 바람이 눈 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때 누군가 발자국을 발견한다. 사람의 것보다 훨씬 크고, 그러나 분명 두 발로 걸어간 흔… 더보기

나만의 등불 밝혀 내 마음 찾는 여정

댓글 0 | 조회 151 | 2026.03.11
강진 무위사의 ‘보름달 명상 템플스테이’어둠이 존재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빛을 만난다. 추석 보름을 앞두고 차오르던 달빛도 구름에 모습을 감춘 날, 가로등조차 없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