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밤길은 지금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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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밤길은 지금도 무섭다

0 개 2,186 오소영
아홉 살 어린 나이 때, 아버지께서 퇴근 해 집에 오시자마자 부르는 이름. 

“영아~ 저 아래 내려가서 남가네 막걸리 좀 받아오렴”

아버지는 저녁 반주를 늘 남가네 시원한 막걸리로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냉장고도 없던 시절. 하루종일 사업에 시달린 스트레스를 어둑한 큰 독에 서늘하게 보관된 시원한 막걸리로 풀으셨던 것 같다.

해넘이 초겨울 저녁, 겁많은 어린 아이는 골목을 갓 덮은 어둠이 무서워서 주춤거렸지만 꼼짝없이 엄마가 부엌에서 건네주는 작은 주전자를 받아들고 집을 나선다.

이 때부터 가슴이 오그라드는 겁보 어린 딸의 마음을 아버지는 모르셨을까?

키다리 전봇대에서 내리비치는 희미한 백열등 불빛에 따라 오는 그림자도 무서웠다. 교교한 골목. 잔뜩 겁에질려 웅크리고 가는 아이의 치마자락을 흔드는 짓궂은 바람에도 흠칫 흠칫 놀래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도 소름이 돋았다.

가계들이 있는 ‘큰  우물거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웅크렸던 가슴이 조금 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대중 목욕탕처럼 커다랗게 네모진 우물벽이 마치 괴물같다. 놀이터처럼 넓은 대동 우물 주변에 김칫거리도 씻고 빨래도 하느라 늘상 시끌법석이던 낮과는 달리 적막속에 잠긴 그 우물 곁. 남가네 막걸리집 기둥에 희미하게 남포불이 흔들린다. 반가워서 한걸음에 뛰어든다. 다시는 안 나올 것처럼... 

침침한 안에서 나온 누군가에게 주전자를 맡기면 큰 독에 걸쳐진 손잡이가 긴 바가지로 휘휘 저어 찔끔 떠 담아 건네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뒤돌아보니 더 짙게 어두워진 거리. 저 곳을 어찌 또 지나가나? 작은 가슴이 쪼그라들기 시작하지만 자박자박 다시 걸음을 옮겨야 했다.

해 짧은 겨울. 이렇게 무서움을 타는 아이라는걸 알면 아마 오빠나 언니를 시킬 것 같은데도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느끼는 아이는 마다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새들이 둥지를 찾아드는 소릴까? 바람도 잔잔한데 갑자기 나뭇잎이 흔들린다. 이렇게 무서울 땐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 귀신 이야기가 꼭 떠 오른다. 어디선가 시커먼 손이 나와 덥석 끌어 갈 것만 같은 생각에 빠른 걸음도 더디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누가 뒤따라 오는 걸까! 걷는 발걸음을 똑 같이 따른다. 빠르면 그도 빠르게 천천히 걸어보면 천천히... 누군가가 놀리나싶어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린다. 바짝 긴장해서 빠른 걸음을 옮기는데 어쩌면 그리도 발걸음이 똑 같은지.... (어떡해 ...어떡해...) 까무라칠듯 혼미해져 오는 정신으로 엉겁결에 “걸음아 날 살려라” 냅다 뛰기 시작했다.   

“엄마아~~” 대문을 박차고 대청마루까지 한 걸음에 뛰어 올라 그냥 동그라졌다.

“얘가 왜 이래?” 놀래서 뛰어나온 식구들 “응? 근데 이게 뭐냐?”  

엄마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셨다. 한바탕 집안에 웃음보가 터졌다.

가슴이 짓눌려 금방 죽을 것만 같은데 웃는 식구들이 미웠다.

“연 줄이 애 발에 얽혔네”

전깃줄에 걸렸던 연(鳶)이 바람에 떨어져 딩굴다가 하필이면 겁쟁이 아이의 발에 감기다니...

그 날 이후. 이젠 그만 두라고 하시길 바랬는데 그 다음부터는 오빠와 동행을 시킨 아버지. 

세살 위인 오빠에게 쥐어박히기도 하고 싸움도 곧잘 했는데 밤 심부름엔 손을 꼬옥 잡고 그리 믿어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짖꿎어 밉던 오빠가 너무나 정겹고 따뜻해 졌다.

그 시절 우리 아버지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방법으로 자녀들을 훈육하셨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마 그 때부터 였을거다. 오빠를 믿고 따르면서 결혼 할 때까지 연인처럼 붙어다녔던 남다른 특별한 남매가 되었던 것이... 

너무도 여리고 겁보인 어린 딸에게 험한 세상 잘 살아가도록 담력도 키워 주셨고 남매간의 우애로 가족간의 확실한 개념을 일깨워주신 아버지. 그 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철이 들고서야 알게되었다.

이제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온. 여정을 돌아보는 싯점에 서 있다.   

어려운 일, 두려운 일, 참 많이도 경험하며 살아온 긴 인생길. 절망의 늪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버텨온 것도 어렸을 적 아버지의 조용한 훈육의 힘이었을 것이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던가.

하지만 어둔 밤길만은 지금도 두렵다. 이제 옆에 동행 해 줄 오빠는 물론. 한때 지킴이가 돼주던 남편. 그 다음 자식들. 모두가 떠나고 없다. 겁도없이 너무 먼 길을 와 버렸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일까? 늙으면 애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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