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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0 개 2,306 박건호
17살. 나는 카페에 자주 갔었다. 스타벅스, 카페베네 등의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오기 전이었던 시절 이야기다. 가게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2층에 있었던 그 카페는 창문이 아주 넓었다. 알맞은 높이의 갈색 테이블과, 빛바랜 붉은 빛의 소파들이 홀을 중심으로 둥글게 정렬되어 있었다. 홀 가운데에는 조화가 분재된 화분들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겨울, 햇빛이 가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올 때면, 가짜 잎사귀에 쌓인 먼지들이 하얀 빛 속에 이따금씩 팔락거렸다. 생화보다도 더 아련한 분위기를 불러오니까 먼지를 닦지 않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풍경의 프레임들은 나비처럼 내 눈가에 번져들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오후시간엔, 카페사장님은 최신가요보다 LP판을 주로 틀었다. 카페의 카운터 옆 구석에는 LP들이 쌓여있었다. LP들은 80년대 중반 이후부터의 가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들국화, 시인과 촌장, 조동익.. 특히 조동익의 동경 앨범 중 <경윤이를 위한 노래>가 흘러나올 때면, 카페의 면면이 극도로 단순화되곤 했다. 바늘이 동경의 얇다란 실루엣을 섬세하게 긁어내는 소리가 들릴 무렵이면, 카페의 모든 물건들의 채도가 조금씩 조금씩 잦아들고, 그림자와 빛이 맞대고 있던 등을 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치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흐릿하지만 명확하게 그 시간의 찰나를 잡아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당시 난 미성년자였지만, 고등학교는 그만두었던 상태였다. 남학생의 두발은 3cm로 유지하라는 가정통신문 같은 것이 아직도 발송되던 때였다. 이 때문에 머리만 기르면 어느 정도 나이를 숨길 수 있었던 순박한 시절이었다. 가만히 담배를 피우며 카페 사장, 알바 누나와 노닥거리고 있으면(그들은 물론 내 나이를 알고 있었다) 학교를 땡땡이 친 친구들이 놀러오곤 했다. 주로 음악 얘기를 많이 했었지만, 당연히 학교 이야기, 그리고 당시 있었던 이라크 전쟁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웃기던 시간이었다. 주섬주섬, 사장님이 꺼내준 귤을 까먹으며 아르바이트 생 누나가 만들어 준 지독히도 달기만 한 파르페를 먹으며 커다란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여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만가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뽀얀 입김이 나오는 계절의 뉴질랜드에서 10여년전 그 때를 생각한다. 귤의 껍질을 까는 소리가 모닥불처럼 타닥타닥 거린다. 그 때 그 파르페는 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을테지만, 그 “달기만 했던” 맛은 내 몸 한 구석 어딘가에 박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만 같다.
 
그 때 우리가 했던 이야기 소리들 또한, 금방이라도 내 귓가에 들릴 것만 같다. 마치 귤을 까는 소리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듯이, 정말로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 땐 그랬다. 내가 눈물을 흘린다면, 세상 모든 것이 나를 위로하리라 믿었다. 분노를 할수록, 세상이 깨끗해지리라 믿었다. 레고처럼, 내 안에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먼 훗날 설령, 내가 나의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보잘 것 없는 레고조각이 될 지라도, 내가 택한 이 추억은 후회 없을 미래에 이미 놓여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소중한 기억은 그 기억만큼, 낭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방어선의 윤곽을 내 안에 그려놓았다. 윤곽 안의 기억은 그 실루엣만큼 분명하지 않고 희뿌옇지만, 흐릿한 것이 현실보다 또렷하게 다가올 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릿함은 차갑고 건조한 이국의 공기에 소복히 섞여든다. 넥워머를 얼굴 위로 끌어올리고, 그 속에서 코를 움츠리고 앞을 똑바로 바라본다. 내 앞에는, 그 때의 그 거리와 친구들이, 웃음소리들이 보이고, 귓가에는 LP의 희미한 잡음이 회전한다. 그렇게, 기억의 윤곽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다.
 
며칠 전, 그 때 그 카페는 지금은 우동가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나씩, 모든 시간은 조용히 사라지며 절실한 현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내가 오늘 이 걸음을 걸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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