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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남섬을 떠나 역동의 도시로
나의 생활 기반이 남섬 Dunedin에서 1987년 Auckland로 옮겨지니 매 일상이 바빠졌다.
드네딘은 오로지 세 가구의 한국인 가족을 만나든지, 아니면 현지 친구를 가끔 만나는 정도로 단순했었다.
그런데 오클랜드의 삶은 말 그대로 뉴질랜드 제일 큰 도시답게 차량도 아침저녁 출퇴근에 서행 운전이 될 정도로 붐비기가 그때도 일상이었듯, 드네딘 같이 생각하면 이곳에서는 따라가지 못하고 떠밀려 나가야 했다.
이사를 간다는 내게 현지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복잡하고 시끄러운 오클랜드로 가려 하나?”
그들의 눈에 오클랜드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였겠지만, 당시 서울의 800만 인구 속에서 단련된 내게 95만 명의 오클랜드는 오히려 정겨운 규모였다.
그들의 순박한 걱정에 나는 그저 피식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오클랜드의 출퇴근길 정체와 빠른 삶의 속도는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정적인 삶에서 동적인 삶으로, 나의 이민 제2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몇 해 전 대한민국 서울에서 살던 나에게 그들의 말은 웃지 않을 비교 대상이 아니잖나!
남섬 드네딘에서 크라이스트처치(CH) 가는 것도 많지 않을 당시는 그러했고 지금도 비슷하다.
CH에 갔다 오면 마치 우리가 시골에 살다 서울 구경 갔다 온 이야기 ‘뽕’을 많이 넣고 하듯 그들도 그런 형편으로 이해하면 된다.
하물며 오클랜드라!
그들에게는 평생 오클랜드 땅을 밟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말로만 듣던 당시의 오클랜드는 그들에게 별세상의 모습으로 말을 하더라.
그래서 나는 피식 웃었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네 그려.
교민 사회의 구심점이 된 데번포트의 추억
이제 본 이야기로 돌아온다. 우선 교민들이 드네딘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오클랜드 교민 사회는 갓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았다.
유학생 가족이 대여섯 가구와 또 막 이민 온 교민들이 십 여 가정 뿐이던 시절, 우리 집은 늘 열려 있는 사랑방이었다.
“선생님, 지금 페리 탔어요!”라는 전화 한 통에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데번포트(Devonport) 선착장으로 달려나갔다. 배 위에서 손을 흔드는 교민들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뭉클했다.
빅토리아 산(Mt. Victoria)에 올라 오클랜드 전경을 함께 내려다보고, 아내가 정성껏 차린 한국 음식을 나누며 이민의 고단함을 달랬다.
식사를 마친 이들을 내 봉고차에 태워 하버 브릿지를 넘게 타카푸나를 통과하고 오클랜드 시내로 배웅하던 길.
심지어 지금도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ㅇㅇ 씨 부부는 어떻게 내 집 주소를 가지고 스스로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 아마도 내가 선식업하는 당시 해양잡지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간직하여 찾아왔던 모양인데 참으로 신기했었다.
그분은 이미 외항선 근무 경력이 있어 모든 것 정리하고 뉴질랜드 이민 계획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1988년 올림픽, 그리고 변화의 파도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뉴질랜드에 투자이민 제도가 도입되면서 교민 사회는 급격히 팽창했다.
20여 가구였던 공동체는 순식간에 80가구, 2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나는 서툰 영어였지만 무료 통역과 취업 비자 신청을 혹은 병원 도우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애초부터 도우려 했기에 그들에게 비용 받는 것은 전혀 없었다.
지금은 전문 교민들에게 비용을 내지만 그때는 그런 것 자체가 없었으니 그렇게 순진한 세월이 흘렀다.
당시 우리들의 유일한 안식처는 카이버 패스(Khyber Pass Road)의 세인트 데이비드 교회 별관이었다.
한국인 목사님도 없던 시절, 키위 목사님의 설교를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우리들의 기도는 한결같았다.
“이 낯선 땅에 무사히 정착하게 하소서.”
그 간절함이 모여 1989년 1월, 드네딘의 ㅇㅇ 목사님을 청빙하여 정식 담임목사로 모시며 우리들의 ‘초대 교회’는 단단해졌다.
당시 나는 40줄에 접어든 혈기 왕성한 나이였고, 교민들은 연배가 되거나 젊은 층이 7:3으로 섞여 이곳 한국인들의 집합소를 이뤘다.
예배 후에는 짝지어 담소하거나, 또 우리의 명절 때는 원트리힐(One Tree Hill), 로건 파크(Logan Park) 공간에서 60~70명 이상 참석해 야외 식사도 나누고 게임도 즐겼다.
그때의 이런 규모는 오클랜드에서 큰 행사의 만남이 되었다.
그런 시기에 오클랜드 첫 “한국의 날” 행사도 가졌고, 교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워터뷰의 첫 집, 기쁨과 시련의 교차

1988년 초 나는 데번포트 근처 렌트하우스에서 이제 나의 작은 집 구입을 목표로 오클랜드 전체를 훑어보았다.
주 사업 무대인 오클랜드 항만 접근성을 1순위로 잡고 찾다 보니 워터뷰(Waterview) 지역이 최선이 되더라.
1989년 초, 드디어 내 인생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Waterview의 1,012㎡ 대지에 방 두 칸짜리 집을 당시 $105,000으로 구입하게 된 것이다.
1979년 과천 주공아파트를 분양받고도 입주조차 못한 채 이민 길에 올랐던 내게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 4식구가 온전히 발 뻗고 잘 공간’이 생긴 셈이었다.
동네는 남태평양 섬 주민이 많아 다소 후졌지만, 뒷뜰 텃밭에 깻잎, 고추, 파 같은 채소 심기는 참 좋았다.
아내는 찾아오는 교민들에게 정성껏 식사 대접을 하느라 참 힘들었을 텐데, 당시의 뉴질랜드에 오신 교민들은 대부분 우리 집을 모두 찾았다.

그들에게는 이곳의 정착과 생활 정보 등 모두를 필요했었다.
그러니 때가 되면 식사는 함께 나누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지냈으니 나중에야 그 고생을 알았다.
뒷날 들으니 “ㅇㅇ 선생네 집 밥 안 먹어본 사람 없다”고들 하더라.
그때 흘린 우리 부부의 땀방울에 대한 가장 따뜻한 칭찬이었다.
그러나 정착의 기쁨도 잠시, 시련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느 날 밤, 외출 후 돌아오니 마당의 봉고차가 없어지고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화장실 뒷창문을 깨고 들어온 침입자가 가구와 서류를 뒤엎고 큰 TV, 카메라 등 귀중품을 훔쳐 간 이후였다. 마당에 주차 했던 Van 차량과 함께 달아 났다.
급하게 경찰을 불렀고 보험사에 Claim을 청구했다. 며칠 후 차량은 근처 Pt. Chev에서 찾았고 다른 물건들도 보험 보상으로 해결되었지만, 내 생애 첫 도난과 보상의 기억은 지금도 서늘하게 남아 있다.
흙과 함께 단단해진 44년의 세월
‘오클랜드의 첫 삽’을 떴던 그날의 땀방울과 설렘, 그리고 예기치 못한 도둑의 방문까지. 그 모든 조각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고백한다.
흙을 일구며 뿌리 내린 그 시절의 우리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내 이민 삶의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이 동네를 떠나지 못했다.
4블록 넘은 조금 나은 지역으로, 또 시내 식품점 2층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다시 이 지역의 중간 지점으로 돌아왔으니, 워터뷰와의 인연은 참으로 끈질기다.
나의 첫 집에 얽힌 좋고 나쁨이 한데 묶여 오늘에 이른다.
44년 뉴질랜드 삶의 보금자리 뿌리는 그렇게 워터뷰(Waterview Area)의 흙속에서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