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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도 종환
바람이 멈추었다
고요로 가야겠다
고요는 내가 얼마나 외로운 영혼인지 알게 한다
고요는 침착한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보게 하고
내 육신야말로 얼마나 가난하지 알게 한다
고요는 내가 버리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오래 된 상자를 열어 보여 준다
그 안에 감추어둔 비겁하고 창피하고 나약한
수 천 페이지 일기를 나는 다 읽을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자주
바닥이 드러나는 사람이었는지 고요는 이미 다 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곳마다
내 안은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한 텅 빈 방이다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도 침묵하는
내 얼굴의 붉은 곳을 고요는 정직하게 보게 하고
내 안에 있는 창녀와 성녀를 만나게 한다
내 안에는 타오르는 불길과 오래 흘러온 강물이 있다
고요는 그 불꽃을 따스하게 바꾸고
많은 것을 만지고 온 두 손을 씻어준다
고요는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촛불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
아직도 내 안에 퇴색하지 않고 반짝이는 것과
푸른 이파리 같이 출렁이는 것이 있다고 일러준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차 한 잔을 건넨다
다시 아침 해가 뜨고
오늘 이렇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라고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생은 계속된다고 조그맣게 속삭인다
다시 별빛을 바라보고 자신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한 것들은 신께 판단을 넘기고
고요의 끝에 왜 두 손을 모으게 되는지 돌아보게 한다
물어보게 한다
바람이 멈추었다
다시 고요로 가야겠다
■ 오클랜드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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