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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또 감사!! 2020년에는 20배로 더 웃자’
금년초, 내 카톡 프로필 란에 써놓은 메세지다. 꼭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강한 마음의 소리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 일년을 마무리하는 12월의 그 끝자락에 와 있다. 지난 시간들을 차분히 돌이켜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
과연 그리 살았을까? 20배로 웃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세상일 복잡한거 다 내려놓고 맘껏 웃고 살려했는데 안타깝고 아쉽다. 내 생애 경험 해 보지못한 코로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감사하다는 말은 입 안에 못이 박히도록 읊고 또 읊었다. 그 또한 코로나 때문이었다.
지난 1월 19일, 순풍에 돛단듯이 계획했던대로의 멋진 ‘크루즈’ 여행이 시작되었다. 으리번쩍한 배에 몸을 실으니 거긴 완전 다른 세상에서의 삶이었다. 늘어지게 호강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큰 일이네요, 지금 중국에선 전염병이 돌아 난리랍니다”
로비에서 컴퓨터 영상을 보던 가이드(여행사 사장님)님의 말이었다. 우리가 사는 나라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내 고국 대한민국에서의 일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남의집 불구경하듯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겼다.
여행을 마치고 배에서 내리니 우리는 먼 나라 이방인이었다. 벌써 전염병이 온 세상을 휘덮고 있어 지구사람들 전부가 시끌벅적했다.
발생지 중국 우한의 이름을 따서 ‘우한폐렴’이라더니, 신종 ‘코로나’로, 그리고 ‘코비드19’로 명칭조차 어지럽더니 무섭게 위협을 해 왔다.
소리소문도 없이 전염병 회오리에 휘말려버린 대한민국 내 조국. 거긴 내 동포, 피붙이들이 뿌리내려 살고있는 땅이다. 그들의 안위로 태산같은 걱정속에 묻혀 살면서 아득하게 먼 곳에서의 난리라고만 생각했다.
그 불똥이 이렇게 먼 섬나라 여기까지 날아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배 타고 왔을까? 비행기에 실려 왔을까? 바람타고 살금살금 소리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사실 만화방초 아름다운 꽃계절 4월쯤, 고국 나들이를 하고 싶었다. 작년 12월 ‘무지개 시니어 중창단’ 10주년 대 공연도 무사히 마쳤다. 이제 홀가분하게 좀 쉬면서 해도 되지않을까 라는 여유로운 생각이 들었다.
친정 식구들, 친구들이 많이 그리웠다. 딸 애가 새 아파트로 이사한지도 벌써 삼년째로 접어들었다. 궁금한 일들, 참아온 그리움들이 가슴속에서 무섭게 용솟음 쳐왔다. 8년만에 여행계획을 세우고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젠 틀렸다. 진즉에 가봤어야 했을걸.
코비드19, 1단계를 거쳐 2,3단계 드디어 4단계 록다운이 시작되었다. 지난 3월 26일이었다.
사람들은 집 안에 갇혔고 땅의 길, 하늘 길이 다 막혀버렸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막힌 일이었다.
공격해 오는 적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선전포고 없는 바로 전쟁터였다. 떨어져살던 사람들이 서둘러 귀향을 하고, 마트에 먹을걸 사재기 하느라 야단 법석이었다. 창살없는 옥살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다음날 병원 예약이 돼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하게 되었다. 늘 다니던 길을 나섰는데 죄를 짓는 것처럼 가슴이 짓눌렸다.
도로는 텅 비어있고 도시는 쥐 죽은듯 고요했다.
어디선가 소리없는 코로나귀신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불안감, 온 몸의 근육이 뻣뻣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창공을 자유로이 날으는 새들의 날개짓이 왜 그렇게 부럽던지... 소음없는 세상이 고도처럼 적막했다.
아마도 그 기간이 많이 길었더라면 노인들 우울증이 코로나보다 더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뉴질랜드’... 발빠른 조치로 시련의 고통이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며칠 전, 시티에서 행해진 ‘산타 퍼레이드’를 보았다. 여기저기 작은 규모의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교민단체도 빠지지않고 참가를 하고 있다. 사물놀이패의 징 꽹과리 소리가 뉴질랜드를 흔들어 놓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겁을 하고 달아났으면 좋겠다.
“이 난리에 무슨 퍼레이드 ?... 거긴 별세상이네요”
코로나 세상에 퍼레이드를 하다니, 과연 우리는 별세계 사람들이 맞다.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진행중임을 명심하고 지침을 철저히 따르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언제쯤이나 코로나가 우리곁에서 영원히 사라질지...
며칠전, 한국의 동생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대단치는 않지만 상을 하나 탔다는 거였다.
암투병을 하면서 환자의 삶을 살아가는 남동생이었다. 무엇으로 상을 탔는지는 모르겠지만 울컥 가슴이 메어왔다.
얼른 상장을 보내라고 보챘다. 가톨릭 어느 교구에서 모집한 체험수기 우수상이었다. 암투병기쯤으로 생각을 했다.
병마와 싸우면서 절절하게 고단했던 사연이리라. 외지에 떨어져 산답시고 문병한번 하지못한 안타까운 피붙이는 눈물이 먼저 앞을 가렸다. 그런데 잘못 짚었다. 징징대며 어찌어찌 살아났다는 투병기가 아니었다. 그가 너무 당당해서 투병하는 환자라는 생각이 싹 달아났다.
우연한 만남으로 알게된 한 가정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하게된 진솔한 이야기였다. 항상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신자다운 신앙백서였다.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마음의 승리자가 되고픈 동생의 심중을 이해해야 했다. 열살이나 아래인 동생이었지만 그 의연함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그 날도 병원에 들러 CT촬영을 마치고 귀가중이라고 했다.
그는 병중에 아내마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고통이 골수에까지 사무쳤을 외톨이 70대 남자다.
안부 묻기도 겁이나서 자주 연락도 못했다. 얼마나 속물같은 내 기우였나?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 그 열의가 너무나 고마웠다. 어렸을적 동생이듯 진심으로 칭찬을 많이 해줬다.
“전에 시청에서 누님 상 타실때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몰라요”
그는 아이처럼 응석조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대도 잘 해 내리라 믿어요, 아무래도 우리들은 글쓰는 머리를 쬐끔 타고난 모양이지”
앞으로 많이 써 보려고 노력한다는 동생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는 분명 건강을 되찾으리라는 확신을 했다.
그는 육남매 중 제일 성격이 온순하고 마음이 따뜻한 다섯째다. 어머님 생전에 누구보다 편안해 하는 아들 집 이었다.
지금도 역시 어머님 산소를 살피는 아들은 그 동생이다. 묘지앞에 회양목 자랐다고 사진찍어 보내고 꽃도 새로 심었다고 알려왔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밤새도록 내렸다. 얼마나 많이 왔는지 대청 마루끝까지 눈이 쌓였다. 그 아침에 첫 울음을 하고 태어난 동생. 음력으로 동짓달 열이틀 날이었다. 내 평생 제일 눈이 많이 내린 날이어서 잊어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하얀 세상에서 태어나서일까? 눈처럼 맑고 고운 심성으로 가정도 평화로웠다.
이제 나는 그 동생을 환자라고 걱정하지 않으련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써내는 다음 작품을 기대할 것이다.
2020년, 병을 이겨낸 동생을 더불어, 코로나로 거칠어진 별난 세상을 잘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하고 싶다.
나를 아는 주변 모든 사람들, 그리고 피붙이 동기간들, 친지 친구들, 별탈없이 새해를 맞이할 수 있어서 감사한다.
록다운으로 집콕하면서 새롭게 일을 찾아낸 것도 감사한다.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는 끼를 발견한걸까? 그림칠에 도전해서 그 매력에 푹 빠져 외로움같은거 내겐 없었다.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꽃들을 곱게 곱게 아마 수천송이쯤.... 그들과 소곤소곤 대화하며 메말랐던 정서가 촉촉하게 살아나는걸 깨달았다. 비록 생명없는 자연이었지만 충분한 위안과 즐거움을 안겨줘서 더없이 행복했다.
그 어느 날, 혼자서 살아내야 하는 고독의 순간들을 미리 공부해두는 것 이라고 생각하니 견딜만 했다.
잘~ 가거라 2020년! 코로나도 함께하고 가 줬으면 얼마나 고마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