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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하루의 일과를 별 탈 없이 마친 귀가 길은 늘 산뜻하게 마련이다. ‘하버 브릿지’를 건너는 버스 안에서 석양에 물든 고운빛 물 위에 뜬 ‘요트’들의 한가로움이 너무 아름다워 ‘카메라’의 셧터를 눌렀다. 이 멋진 풍광을 나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워 고국의 동생에게로 바로 전송을 했다. 때 묻지않은 청정의 나라 ‘뉴질랜드’에 사는 나를 부러워하는 그들에게 영상으로라도 즐기라고 종종 사진을 찍어 보내는게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린 나.
이 시간 그는 무엇을 하다가 이 사진을 접하고 반가워 할까? 늘상 그런 궁금증으로 어깨를 추스르며 답을 기다리곤 했다. “메세지 왔어요”-- 조용한 집안에 아기의 귀여운 음성이 반갑다.
내외가 다정하게 서서 찍은 사진 한장. 백발의 노신사와 단짝꿍인 동생댁. 그런데 배경이 많이 낯설다. 그 밑에 (‘프라하’에서) 라는 간단한 문구. “와우.... 그럼 그렇지” 그들은 지금 해외 여행중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는데 확인이라도 하듯 ‘동유럽 여행중’이라고 다음 메세지가 왔다. 동유럽 ‘체코’의 수도 ‘프라하!’ 나는 한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서유럽을 시작으로 4년 전에 다녀 온 북유럽. 다음으로 마지막 남은 나의 여행코스가 바로 동유럽 아닌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프라하’는 내가 죽기전에 꼭 가 보고싶은 곳 중의 하나로. 순위가 맨 앞 쪽에 있다. 유럽 중심부에 자리한 ‘체코 슬로바키아’는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야 했던 눈물과 한숨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그래서 ‘체코’는 ‘보헤미아’(집시) 라고 했다. 애수와 낭만이 깃든 ‘보헤미안’. 그들 역사속에 노래와 춤을 즐겼던 집시족.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을 것만 같아 낭만이 먼저 떠 오르기 때문일까? 일찍이 내 안의 보헤미아를 자극했던 ‘프라하’.
‘소련’의 위성국으로 사회주의 공화국에 ‘체코’ 인들의 자유 민주주의에 염원은 끊이질 않았다. 1968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 개혁의 물결이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소련의 ‘프라하’ 침공. 무자비한 숙청을 한 자유개혁 운동이 ‘프라하의 봄’이라고 배웠다. 그 후 소련이 물러날 때까지 20여년을 춥고 어두운 세월을 공산 독재에서 보낸 나라. 이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따로 갈라져 형제의 나라가 된 ‘체코의 수도 프라하’ 같은 피를 나눈 국민이 평화롭게 헤어져 다른 국민으로 살아가는 형제의 나라 사람들. 남 북이 갈라져서 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와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놀랍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동생이 내 맘을 알았다면 한마디 동행을 권했을지도 모르는데... 괜스레 서운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몇년 전 ‘뉴질랜드’도 다녀간 그들 내외는 해외여행을 심심치 않게 다니는 멋쟁이들이다. 생각 해 보니 아마도 이번 여행은 동생의 칠순을 기념하는 효도여행이지싶다. 구순(九旬)의 어머님을 모시고 딸네 네 식구와 사대(4代)가 함께 사는 대 가족. 가정의 정서를 물씬 풍기며 전원생활을 제대로 즐기고 사는 아주 괜찮은 남자 사촌동생이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않은 경기도 여주(麗州) 외진 땅에 손수 설계한 집을 지었다. 한 지붕아래 두 세대가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게 지은 것은 이미 딸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나보다. 도자기를 굽는 사위를 위하여 한켠에는 공방과 가마까지... 서울에 직장을 가진 아들은 내보내고 딸과 함께 외손자들 재롱 지켜보는 재미로 살아간다.
남의 집 아들(사위)과 같이사는 이유로 사돈에겐 감자 고구마 수확하러 내려 오라고 불러서 바베큐 파티 질펀하게 벌이며 친구가 되어 살아가니 좋단다. ‘사돈집과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는 옛말은 정말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이젠 화장실도 방안에 두고 사는 세상이니 사돈과 절친처럼 지내는게 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리 흔한 일도 아니기에 그들 살아가는 방법이 아주 현명하고 재미도 있어 보였다.
언제부터 그가 자연인이 된 걸까? 사업의 실패가 그를 시골로 내려가게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그걸 전화위복으로 뒤집는데 성공했다. 농사 농자도 모르는 서울 토박이가 털털한 차림으로 농부가 되었는가 싶더니 술 좋아하던 사람이 술 대신 목공예도 배웠다. 그런 재능이 있었나? 의아한데 솜씨가 좋아 전시회도 가진 모양이다. 집 안 곳곳에 작품을 만들어 배치 해 놓고 도공(陶工)의 집에 목공예가 어우러져 멋진 예술의 향기를 뿜어내는 집안을 만들었다. 손대지 않은 은발의 긴 머리 바람에 날리며 아직도 새 색시같은 아내와 함께 여주에 있을 사람이 ‘프라하’라니... 아마도 사돈들과 동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며 문득 마음 밑바닥에서 뭔가가 꿈틀대는 불편함을 느꼈다. 그런 묘한 감정이 아마도 시샘인지... 수 만리 떨어진 곳에서 이미 종이 호랑이 신세가 된 늙은 시누이의 속 마음을 그들은 짐작이나 할까? 피식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허튼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니 어느새 고희(古稀)를 맞이한 동생이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화살처럼 지나가는 세월의 무상함이 안쓰러운 혈육의 마음. 바로 그 진심일 것이다.
시나부로 3개월여를 허릿병에 시달리면서 4월에 계획했던 여행도 실행이 어려워 그냥 지나간다. ‘동유럽’ 여행은 아마도 꿈으로만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요즈음이다. 자신감도 점점 없어지고 겁쟁이가 되어가는걸 스스로 깨닫기 때문이다.
‘보헤미안’으로 떠돌이가 되어 살고싶었던 꿈의 날개를 화알짝 펴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시들어 버리다니... 그래서일까? 그들은 벌써 귀국해서 일상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데 내 뇌리속엔 아직도 ‘프라하’ 그 곳에 머물러 있다. 마치 거기서 부르는 것처럼 한달음에 달려가고픈 착각속에서 살아가는 나. 언제쯤 나는 그 ‘프라하’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