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자주, 기왕이면 매일매일 하고 싶은 것 중에 목욕이 있다. Take bath, 그러니까 단순히 몸을 씻는 샤워가 아닌 ‘목욕’이다. 말 그대로 욕조에 몸을 푹 담그는 것. 매일 밤 퇴근한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미리 받아 놓은 뜨거운 물 속에 풍덩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야말로 사치 중의 사치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꽤 먼 거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출퇴근길이 길어진다. 출근이나 퇴근이나 내게 있어선 일의 연장선과 다름 없다. 고속도로에서 제한 속도를 넘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좌우로 씽씽 달리는 차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종종 신호조차 주지 않고 불쑥불쑥 끼어들어오는 추월 차량들에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몸도 정신도 지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차를 주차하고 아파트까지 걸어오면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축 늘어져 파김치가 된다. 그럴 때, 미리 욕조에 뜨거운 물이 한껏 받아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못해 내가 직접 가서 수도꼭지를 틀어 온수를 콸콸 쏟아 붓는 것도 좋을 텐데. 물이 차는 동안 화장을 지우고 핸드백의 내용물을 정리하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으며 잔뜩 기대에 부푼다. 이제 곧 부유하는 세계 속에서 - 비록 머리 아래만이지만 - 쉴 수 있어, 라고.
목욕탕에 가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단연코 온탕에 들어가 말 그대로 ‘쳐지는’ 것이다.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가 된 듯한 기분 좋음으로. 적당한 온도,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따스함이 내 몸을 감싸는 순간 떠안고 있던 모든 근심걱정이 별 것 아닌 수증기처럼 느껴진다. 아, 거 봐. 천국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니깐. 그렇게 생각하며.
고백하자면 어렸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제일 싫어한 것은 온탕이었다. 지금이야 뜨거운 물의‘시원함’을 알게 되었으니 문제는 없다지만, 어렸을 땐 손만 담그고서도 뜨겁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덕분에 딸을 씻기려던 엄마는 목욕탕에 와서까지 실랑이를 해야 했다. 다행히 눈치(?)는 있는 아이였기에 큰 소리를 지르거나 해서 엄마를 곤란하게 하진 않았지만, 목욕이 끝난 후에 적당한 뇌물을 - 예를 들자면 바나나 우유라던가 - 쥐어주지 않으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곤 했다.
물론 지금도 지나치게 뜨거운 물은 고역스럽다. 일본엔 뜨거운 것을 못 먹는 고양이 혀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표현을 내게 적용하자면 고양이 피부(?)라는 어구가 적당하지 싶다. 정말이지 온도에 지나치게 예민해서, 조금만 추워도 금세 손발의 핏줄이며 피부가 희다 못해 거의 푸르스름하게 곤두선다. 뜨거운 것도 마찬가지다. 마치 갓 뜨거운 물에 데친 연어처럼 적당히 익어버려선 새빨개진다. 어린 아이들이면 그렇게 불그스름해도 귀엽기나 하지, 다 큰 처자가 전신이 발개져봤자 웃기기만 하고 하나도 사랑스럽지 않다.
게다가 큰맘 먹고 뜨거운 물에 첨벙 다이빙을 해도 순식간에 뛰쳐나와 방방 뛰어다니고 마는걸. 발끝부터 조심스레 넣으며 적응을 하는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해 봤자 1분짜리 고문을 10분에 걸쳐 천천히 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너무 뜨거운 물은 힘들다.
어떤 목욕탕의 온탕들엔 무슨 차가 들어간 티 배스(tea bath)라던가, 쑥탕이니 인삼탕이니 하며 특이한 탕들이 있는데 그것도 맘에 든다. 딱히 그렇게 강조된 것처럼 몸에 좋을 것 같아서라기보단, 어째 정말 식재료가 된 듯한 느낌이 재미 있어서랄까. 마치 삼계탕의 닭처럼.
하지만 아빠가 보스인 우리 집은 ‘물낭비’라는 명목 하에 정작 욕조 사용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집에서 목욕을 할 수 없는 게 제일 한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