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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탈 때 어린 남자아이들의 관심을 확 잡아 끄는 사람들이 있다. 어두운 색계통의 제복을 작용하고 모자와 소맷부리, 가끔은 어깨에 까지 금색, 은색 휘장을 달고 무언가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는 pilot들이 그들이다. 겉보기에 멋져 보일 뿐 아니라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풍겨서 그런지 많은 사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Pilot이 되고 싶다고 소망한다. 그런데 이들이 착용하는 제복의 금색, 은색 장식들은 그저 멋을 위해서나 계급을 표시하기 위한 것 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국제적인 공통 표식이라 한다. 바로 승객의 생명을 ‘책임’ 지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그래서 네 줄의 견장을 단 기장은 유사시 승객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니 비행기나 여객선 안의 최종 권력자로 불릴 만 하다.
예전부터 중국에선 세 가지의 직업이 세상을 평화롭게 유지하며 발전적으로 경영하는데 중요한 ‘책임’이 있다고 여겨져 왔다. 판관(법관), 의사, 선생이 그 세가지 직업인데 판관은 정의를 구현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며 불의에 저항해 ‘사회 공정성’에 대한 책임을 진다. 의사는 정성을 다해 환자를 돌보고 공중보건을 위한 의견을 건의해 정책에 반영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건강한 삶’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리고 선생은 성심 성의껏 학생들을 가르쳐 당대의 지식인을 배출함은 물론 그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 ‘사회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진다. 물론 세상의 모든 직업들이 그 의미가 있고 역할이 있으며 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고 따라서 중요성을 지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세가지 직업에 전통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지금과 나중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인간과 사회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국경 없는 의사회’나 UNICEF 자원봉사 의사들처럼 존경 받을 만한 의사 선생님들의 이야기도, 또 그 보다는 찾기 힘들지만 간혹 신문 정치면이나 SNS에 회자되는 존경할 만한 정치인, 법관들의 이야기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존경할 만한 선생님’, ‘따르고 싶은 스승’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든 것은 필자가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당장 시급한 사회적 공정성과 안전에 극히 민감하고 평균수명 90세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신체적인 건강이 너무도 중요함은 잘 인식하고 있지만 다음 세대들이 이끌어 나갈 사회의 ‘질’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그저 내 자식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극히 협소한 교육관의 반영이 아닐까.. 그런 우리의 ‘미래 불감증’이 존경할 만한 선생님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부터 반성해 볼 일이다.
뉴질랜드 교육부에서 각 급 학교 선생님들의 실력과 자질을 재 평가하는 방안을 준비 중 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한국의 시스템과는 달리 학생교육에 전문화 된 ‘교육대학’ 이나 ‘사범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이 곳 시스템은 일견 취업의 문을 넓히고 다양한 경력의 선생님들이 학생 교육에 참여하여 학생의 전인격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특정 교과목의 교사가 모자라게 된다거나 교사들의 전반적인 ‘질’이 하향 평준화 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필자가 간접적으로 경험한 선생님들 중 많은 분들이 위의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학교의 채용정책이나 교과 배정 또한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 공적인 글에 학교와 선생님들의 정보를 실을 수는 없으나 유명 사립학교에서 체육 (Physical Education) 전공자를 물리 (Physics) 선생님으로 채용, 배정해 결국 물의를 빚은 일이나 부족한 지식과 강의력 때문에 학생들의 원성을 사는 선생님이 학교장과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에 주구장창 중요 교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비단 몇몇 학교에 국한 된 어려움이 아닌 것이 문제다. 물론 대다수의 많은 선생님들께서 열과 성을 다해 양질의 교육을 하고 계시지만 항상 특정집단의 불명예는 극히 일부의 ‘미꾸라지’ 들에서 기인하는 법이니 말이다.
필자가 사교육과 공교육의 조화를 강조할 때 쓰는 말 중에 ‘핑퐁을 친다’는 말이 있다.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일 수 있으나 더 적절한 말을 찾기가 어렵다. 이 말은 학생이 탁구공처럼 사교육과 공교육의 두 범주를 무리 없이 왕복하며 두 시스템의 장점만을 획득하는 이상적이고 조화로운 상태를 표현하는 것인데 (사교육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학교의 규격화 된 진도 및 평가시스템과 학원, 사교육의 점수 지향적, 확장적 수업이 학생의 실력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키는 상황을 말하고자 했다. 그런데 2000년대 후반 이후로 같이 핑퐁을 칠 만한 학교나 선생님이 많이 있지 않은 것 같아 참으로 아쉽다. 아무쪼록 교사 재 평가 시스템이 잘 계획되고 정립되어 학생 개개인의 미래뿐 아니라 그들이 살아나갈 ‘사회의 미래’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금줄 네 개 짜리 선생님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그래서 필자도 가까운 장래에 실컷 핑퐁을 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