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대명절 중 하나는 추석이다. 뉴질랜드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별로 없겠지만.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는 아무래도 너무 차가웠나보다. 추석 전날부터 사람들은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받고, 모여서 송편을 빚고,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아, 정 많은 민족 한국인이여. 대체로 나는 그 정이란 것에 회의적인 편이지만 이럴 때는 그 애매모호한 애착감이 실재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누구 하나도 혼자가 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 아무리 머나멀고 그 명절이 존재하지 않는 타향에서라도.
혼자인 것을 선호하는 나이지만 이럴 땐 조금은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훈훈한 것과 귀찮은 것은 별개이고 그래서 나 또한 파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의 홍수를 감당할 수 밖에 없다. 왜 굳이 추석이 있지도 않은 뉴질랜드에서까지 이러는 걸까, 싶지만 그것이 고향에의 향수를 달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아무리 한국보다 살기는 편해도 익숙한 삶의 형식을 잊기는 어려우니까. 물론 이렇게 구구절절이 설명해봤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당해하기만 하겠지만. “멀리 있고 없고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명절이니까 당연히 쇠는 거지.”라면서. 한국을 떠나왔어도 이곳에서 작은 한국을 형성하고 사는 사람들.
명절에 관한 한, 내게는 좋은 기억들뿐이다. 내 성격이 지금처럼 내향적이지 않았던 시절, 명절은 사촌들과 친척들이 모두 모여 왁자 지껄하게 놀 수 있던 몇 안 되는 기회였고 그래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왁자 지껄함을 고대했다. 명절 때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특별한 용돈도. 밤이면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모여 어른들 몰래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베개싸움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었고, 그러다가 다음날 차례를 지낼 때에 늦게 일어나 꾸지람을 듣던 기억까지. 아빠들도 엄마들과 다 함께 전을 부치고 요리를 만들었고, 차례상을 차린 후 절을 하고 다같이 한 상에서 밥을 먹었다.
단 한 가지, 송편을 빚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만두는 잘 만들 수 있지만 송편은 영 밉상인 모양으로만 나오기 때문이다.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자식을 낳는데, 나는 영 시원찮다며 어른들은 놀려댔고 나는 고군분투하며 최대한 엄마의 송편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엄마는 요리를 잘 한다. 엄마의 송편 모양은 아줌마들 중에서도 전설급으로 회자될 만큼).
그래도 늘 모양은 영 아니올시다였지만, 괜찮다. 송편을 먹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으니까.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은 돌아왔다. 사람들의 숨 막히는 귀향길도, 친척들과 화기애애 또는 살벌한 모임도 내게는 모두 머나먼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고보니 일가친척들이 마지막으로 모두 모였던 것이 언제였던가. 그렇게 오래 전 일은 아니지만 마치 수년 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교회에서 나눠준 송편을 먹고, 그럭저럭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선물로 준 과일을 먹었다. 불가피한 차례나 복잡한 의례 같은 것은 전혀 차리지 않아 편했지만, 조금은 쓸쓸했다. 고독하다고 할 만큼. 거기에다 감기까지 걸려버려서, 연신 기침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오늘은 보름달이 뜰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DST가 시작된 탓에 달을 보는 것마저도 요원해 보인다.
추석엔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 그리고 이 글이 나오기까지 수고해주신 분들도 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