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가 온다. 일주일 넘게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비가 오면 떠오르는 시간 몇 가지가 있다.
아주 어렸던 16살에, 나는 독특한 패션으로 거리를 쏘다녔었다. 거대한 굽을 가지고 있는 구두 위에 검은색 스키니진,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번쩍거리는 체인들. 온갖 뜻 모를 글자가 적혀진 색이 바랜 티셔츠와 검은 라이더스. 왁스로 범벅을 한 머리는 항상 빳빳했고, 얼굴은 새하얗게 화장을 하고 다녔다. 그 얼굴 위에는 선글라스에 가까운 색안경을 착용했다. 열 손가락 모두 반지를 끼고 다녔고, 양 손목에는 늘 팔찌가 찰랑거렸다. 지금도 흔치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당시 여자친구의 패션 또한 비슷했다. 그렇게 둘이 손을 잡고 온 거리의 주인이 된 것처럼 쏘다녔다. 우리는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것을 좋아했다. 늘 장마철이 오면 커다란 수건을 가방에 넣고, 미지근한 비에 온몸이 흠뻑 젖으면, 근처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서로의 머리와 비가 잔뜩 묻은 젖은 옷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술을 마셨다. 옥탑방에 살던 나는 옥상으로 올라가 파전을 종종 해먹고는 했었다. 촌스러운 초록색 갑바천 아래에서, 혼자서 때로는 여자친구와 가끔은 친구들과. 막걸리와 파전, 구운 두부같은 것들을 먹고는 했다. 갑바천은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빗물을 떨구어내고, 파전은 기름 위에서 치이이익 하며 익는다. 빗물이 조금 묻어있는 막걸리 병들이 서로의 손을 오가고, 밤이 되도록 비는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후덥지근한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뜨겁게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어딘지 모를 가여운 평화의 시간. 그 고요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고 느끼며- 수다를 떠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들.
군대에서의 비는, 정말 굉장한 추억이다. GOP에 올라가기 전의 마지막 훈련. 나는 심한 변의를 느끼고 삽을 들고 숲 속으로 향했다. 열심히 땅을 파고 바지를 내렸다. 순간 엉덩이 아래로 쏟아졌던 김이 펄펄나는 건강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비는 내리고 있었다. 안경 위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내가 보는 풍경을 점묘화로 물들였고, 나의 배설은 빗소리와 함께 상쾌하게 땅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그것은 잊을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상실이었다. 내 속의 모든 장기들이 자연으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내 안에는 오로지 심장의 고동과 빗소리만이 온 천지의 편안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웰링턴에 온 뒤,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었다. 그 아이의 퇴근시간은 저녁 너머쯤이었다. 파란 비를 맞으며 주황색 귤을 들고 그 아이가 일하는 곳으로 갔었다. 깜짝 놀라는 여자의 표정은 생각보다 보기가 좋은 것이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귤을 내밀었고, 그 아이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며 나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가 오면 버스를 타고 가도 될일이었지만, 같이 걸어주는 것이 참 좋았다. 빗방울들은 유난히 그녀의 얼굴을 좋아했다. 금방 세수라도 한 듯 촉촉해지는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 나는 빗방울들이 부러웠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손수건을 챙겨야겠군.
요즘처럼 비가 계속 내린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비를 맞았다. 비 묻은 귤을 하나씩 까주고, 손수건으로 비를 닦아주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빗속을 부드럽게 유영했고, 절제를 잃고 곤두박질치려는 내 마음을 식물처럼 다잡았다. 다행히 우리는 이제 손을 잡고 있다.
비가 계속 해서 내린다. 전할 길 없는 그리움이 노력하지 않아도 시각화되어서 내 눈 앞에서 낙하한다. 검은 아스팔트 위의, 빗물에 젖은 벚꽃의 잎사귀들이- 마음의 손가락에 하나씩 걸려오는 어떤 존재의 쓸쓸함 같았던 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존재의 그리움이 나를 오히려 외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조금은 넓어진 혹은, 포장된 공감의 나이가 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