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봄날은 간다

[365]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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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이 과하셨어요.
                                   봄이 온다고 뭔들 달라지나요?
                                              왜 설레이죠?
                풍선처럼 빵빵하게 차 오르는 가슴에서 바람일랑 모두 빼내세요.
                                   당신의 심장을 쭈그려 트리세요.
                                          봄날엔 덜어 내세요.
                                      아무 것도 채워 넣지 마세요.
                                         봄날엔 무덤덤해지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돌아 버릴지도 몰라요.

  온천지에 꽃 잔치가 열렸다. 빨강, 노랑, 분홍, 하양, 보라, 자주---. 거대한 고목도 수천 송이의 피빛 청춘을 피워 낸다. 꽃샘추위가 꽃들을 시샘한다. 나도 꽃들을 하염없이 질투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청춘'이 가엾고 그리워서 고목의 꽃 같은 붉은 눈물이 쏟아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엄마는 밥을 하다 말고 부엌 문설주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토끼 새끼 같은 4남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일손을 놓고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 어딘가를 헤집으며 노래 부르는 모습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나는 은근히 불안 해지기도 했다.
  '엄마가 저러다가 집을 나갈지도 몰라.'
  엄마가 둥둥 떠서 대문으로든 창문으로든 나갈 것만 같았다. 참으로 이상한 엄마 모습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남편, 아이들 뒤치닥 거리에 동동거리던 엄마는 어디로 간 것일까? "배고파, 밥줘잉!" 엄마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다시 연탄 냄새나는 아궁이 앞에 앉은 엄마. 노래 한 곡도 다 못 부르고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돌아온 엄마. 바보 같은 엄마, 그래도 봄날인데. 엄마가 다시 돌아와 안심은 되었지만,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고 꽤 폼 나게 살 거라도 입을 앙다물었다. 그 생각이 가슴 속에 뺑뺑하게 찬 헛 바람이었다는 것을 마흔이 넘어서 깨달았다. 아이구, 웬걸! 나이가 먹을수록, 살면 살수록 엄마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세월이 무엇이 다른지, 도무지 찾아낼 길이 없다. 빛 바랜 창호지 같은 삶, 남편과 자식과 가사 노동에 동동거리며 사는 삶, 자신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삶, 봄날의 한바탕 꿈처럼 모든 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삶!

  인생의 봄날은 며칠 되지 않는다. '박제가 된 청춘'에 뽀얗게 먼지가 내려 쌓이고, 겨울이 갔는지 봄이 오는지 상관없이 밀려 가는 게 인생이었다. 어느 날 뒷 뜰에 수선화가 노랗게 피어나면 '아, 봄이 왔구나,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자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놀라서 꽃들을 바라본다. 내가 봄꽃을 보고 놀라지 않은 적이 있던가? 그리고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에는 'Singing In The Rain'의 진케리처럼 비를 맞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다. 하지만 나는 오싹하다. 봄이 갈까 봐, 잡고 늘어져도 매몰차게 가 버리는 봄이 아쉬워서. 겨우내내 땅 밑에서 수선스럽게 키워 내 수십 송이의 꽃을 피운 수선화, 봄의 전령사로 겨울의 뒷 끝을 밀어내며 용기있게 피어난 수선화, 그 공로로 수선화 잎에는 황금 가루가 뿌려져 있다. 솔직히 고백한다. 꽃이 피듯 봄날에는 피어나고 싶은 거다, 황금 옷을 입고 아름답게.

  그 날도 봄비가 간지럽게 내렸다. 나는 설거지를 하며 간간히 뒤 뜰 수선화와 눈을 맞추면서 '봄비'라는 노래를 구성지게(나름대로는) 불러대고 있었다.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나를 우울려 주우는 보오옴 비이이---"    

  "커피 한 잔!" 춘몽을 깨우는 남편. 내 노래, 내 감정은 맥이 끊겨 갈 곳을 잃는다.
  맞다. 내 엄마도 '봄날이 간다' 노래를 끝까지 부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도 앞부분 두어 구절쯤 밖에 알지 못한다.

  "봄이 되면 티티랑기, 커피 맛있는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수다떨자."
  "그래요, 그래." 지인과 약속하고 또 했는데---

  볕이 너무 좋은 오늘, 야외 카페라도 가서 노닥거릴 용기가 없었다. 푸른 잔디밭이 깔린 공원의 벤치에서 책을 보는 것도 사치스러웠다. 겨우내 눅눅했던 이불을 모조리 걷어다가 빨았다. 이불을 회전 빨래 대에 널고 돌아서는데, 데크 군데군데 곰팡이가 눈에 거슬렸다. 지난 겨울 사 두었던 오일을 데크에 발랐다. 반나절, 붓질을 했더니 장갑을 끼었는데도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소동파는 춘소일각치천금(春宵一刻値千金 ; 봄밤의 한때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이라고 읊었다. 억만금을 주고라도 늘려 보고 싶은 봄밤, 나는 동그랗게 구멍 뚫린 손가락에 반창고를 감았다, 세상에!

  봄꽃이 진다, 봄꽃이 떨어진다. 좋은 봄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먼데서 산비둘기 구구 울어 대는 봄날, 가는 봄날이 아쉬워서 울어예는 비둘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봄날은 너무 빨리 흘러간다. 그러나 나는 아직 기다린다, 나의 봄을. 문설주에 기대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