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서울내기 전원에 살다

[358] 서울내기 전원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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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가쁘게 달리던 차가 여주 "세종대왕 능" 부근에서 한숨 돌리듯 속도를 늦춘다. 엄청 조용하고 아늑했을 명당이련만 지금은 개발의 붐을 타고 근처까지 파헤쳐져 어수선했다. 그 능을 뒤로 하고  한참을 달려가니 낡고 볼품없는 기와집들이 금방이라도 쓸어질 듯 위태롭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 집들인지?

  마을을 벗어나 못자리 논들이 반듯반듯하게 자리잡은 외줄 흙 길을 따라 얼마간 더 들어가니 낮은 산이 길을 가로 막듯 버티어 있고 그 산을 병풍처럼 산뜻한 새 양옥집 하나가 당당하지만 외롭게 홀로 서 있다. 바로 그 집인가 보다. 마당 안으로 차가 들어서는 순간 어디서 뛰쳐나왔는지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캥캥 짖어 대는데 서울 개처럼 그악스럽지 않아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반기는 것처럼 싱거워 귀엽기만 했다. 개도 시골 인심을 닮는 걸까? 무겁게 닫힌 현관문이 열리면서 뛰어나오는 사촌 동생과 눈 마주칠 사이도 없이 찐하게 뉴질랜드 식으로 끌어안은 인사를 하고 보니 그가 참 많이도 낯설었다. 헐렁한 개량한복 차림에 이마에 굵게 패인 주름이며 반백의 중노인이 된 얼굴의 남자.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주일 미사를 보고 방금 도착해서 옷을 갈아 입는 중이었다며 서둘러 일상복으로 갈아 입은 옷은 더더욱 낯선 농부 차림이었다. 긴 장화까지 신고 무엇을 하려는지 바쁘게 서두르는 모습이 영낙 없는 농사꾼을 닮아 있다. 처음 밟아 보는 흙냄새에 술에 취한 듯 허둥대 보지만 아직도 뭐가 뭔지 땅과 친해지기엔 멀었단다.  꾀꼬리처럼 예쁜 목소리로 노래 잘하는, 새내기 농촌 아낙이 된 동생댁의 농산물 비싸다는 말 못하겠다는 엄살로 한몫을 거든다.

  정년 퇴직을 하고 낯선 시골 살림을 시작한 그들, 넓직 넓직 한 방이며 재미있는 다락방까지.... 거실문 하나를 사이에 이 쪽은 어른들이. 저 쪽은 딸 내외가 아이들과 같이 더불어 사는 이상형의 사대(四代)가정이다. 시집 갈 때도 보지 못한 조카딸이 벌써 아이들 둘이나 낳았다는데 마침 시댁 어른들 뵈러 서울 나드리를 가고 없어서 만나 보지 못한 게 못 내 섭섭했다. 넓은 흙 마당에서 마음놓고 뛰노는 어린것들의 그림이 한 폭의 풍경화로 눈앞에 그려진다. 앞마당에 올망졸망 알을 품었을 감자 잎이 미풍에 나풀거리고 고구마도 몇 두렁 심어 봤다나, 연두 빛으로 새로움이 넘실대는 고국 산천의 봄나물에 게걸들린 먼 나라에서 온 이 누나를 위해 뒷동산으로 뛰어올라 두릅을 따오며 이런 맛에 여기 산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쌉싸름하고 향긋한 풋나물 맛에 잊어 가던 옛 입맛이 되살아 난다. 어서 많이 먹으라고 옆에서 챙겨 주시는 팔순의 숙모님이 무척이나 어른이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나와 같이 있음에 세월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이 끈끈한 혈육의 정을 몇 년만에 느껴 보는 것일까? 울컥 가슴이 답답해진다.

  땅과 친해지는 틈틈이 목공예로 배워 거실의 가구로 예쁘게 다듬어 배치해 놓고 그 곳이 도자기의 고을 가까운 곳이 아니랄까 봐 흙도 빚어 손수 구웠다며 도공의 흉내를 낸 소품들을 자랑하는데 제법 그럴듯했다. 새의 형상을 구상해 만들었다는 작가다운 설명까지 곁 드리며 귀여운 연적 하나를 내 손에 쥐여 준다. "이걸 보시면서 이 동생을 생각해 주시라구요" 젊었을 때의 익살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 반가웠다.

  아무데도 거친데 없이 바로 내려 쪼이는 양지녁에 조르륵 놓인 장독대,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조차 윤기 나게 보이는 것은 풀 나무가 신선하게 뿜어내는 파란 물이 들어서일까?

  바뀐 환경에서 잘 적응해 가려고 노력하는 서울내기를, 아파트에서는 상상도 못할 편안함과 넉넉함이 물어나 심성이 푸근하고 따뜻해져 가는 것 같다. 빨간 흙이 그대로 남아 있는 빈터는 도자기 굽는 가마터로 남겨 두었다며 그가 진짜 꿈꾸는 미래는 멋진 도공이 아닐까?

  언제인가 다시 찾아올 때는, 그 가마에서 나도 손수 빚은 흙을 구워 볼 수 있을런지...
  마당가에 지천으로 깔린 나물을 뜯는다고 풀섶에 나앉은 내 사랑하는 딸 내외의 등으로 오월의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자연을 탐닉하는 젊은 부부의 다정하고 여유로운 모처럼의 휴식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내 보기에 좋다. 나의 빈 자리를 대신해 외가와 친해져 가는 그들이 늘 고맙고 대견하다.

  이 엄마를 위해 황금같은 주말에 여기까지 달려와 준 그들과 오늘의 전원일기는 오래 오래 내 기억 속에 담아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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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6

수영은 언제까지?

박신영 0    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