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비 속의 요정들! 겨울꽃

[337] 비 속의 요정들! 겨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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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고 축축하고 구질구질한 매일 매일의 겨울날씨. 제습기가 빨아 먹고 쏟아 내는 엄청난 물의 양에 놀래면서 내가 마치 물 속에서 사는 듯 후줄근해져 이 겨울이 지루하고 짜증스럽다.

  빨랫줄에 널린 두툼한 옷들이 차거운 바람속에 시도 때도 없이 질금거리는 비를 맞으며 흉물스럽게 출렁거린다. 이 겨울내내 마르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느긋해서일까. 게을러서일까. 상관않는 것같아 그 느긋함을 닮아 보려고 애써도 그게 안되어 빨래 한 번 말리려면 안절부절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바지런을 떨어야 하니 못 말리는 습관이다. 항상 급한 민족이니 어디 나만 그럴까? 사나운 말의 갈기같은 구름사이로 잠시 얼굴을 내민 햇님을 반길라치면 언제 흘러 왔는지 다시 구름떼가 몰려와 심술을 부리듯 또 비를 뿌린다.

  한국의 겨울은 매섭게 춥고 강해도 하얀 눈꽃이 한바탕 검은 세상을 휘덮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꿔 버리는 그 아름다운 정서에 위로를 받지만 여기 오클랜드의 겨울은 비속에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어쩜! 헐벗은 나무 끝에 매달린 빨간 단풍잎이 아직도 고운 채로 남아 살랑거리는데 “어머나 저 푸른 새싹들 좀 봐”언제부터일까 관목숲 밑 양지짝에 붓끝처럼 솟아 나온 어린 새 순들을 발견하고 경탄으로 바라본다. 춥다고 웅숭거리는 사람들을 비웃듯이 다투어 키 자랑을 하는 자연의 신비감에 놀란다. 비에 푹 젖어 축축하던 기분이 새로운 생명의 태동에 얼마간 활기가 솟는 것같다.

  삐죽 삐죽 너도나도 식구가 늘어 가더니 거긴 벌써 봄이 무르익는 것일까? 성질 급한 어느 것은 어느새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노오란 꽃을…, “예쁘기도 해라”

  골프장 스타트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첫번째 공을 치고 내려가면 맨 먼저 마중해주는 그들, 그 꽃들을 환희와 미소로서 바라보노라면 두텁게 입은 옷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고 훌훌 벗어 홀가분해지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만 못한 것인지? 몸에 감겨오는 실바람조차 싫어서 목수건을 더욱 조른다. 아직도 겨울은 떠나지 않았다. 손가락을 꼽으며 언제까지가 겨울일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해지기만 한다. 난로에 깨스를 한번 더 아니면 또 한번 더 넣어야 이 기분 나쁜 추위가 끝날까? 현실적으로 생각이 바뀌면 잠시 봄을 착각하게 하는 그 꽃들의 속임수에 넘어갔음을 깨닫는다.

  지금 피는 꽃들은 살-금 살-금 쥐를 쫓는 고양이 걸음으로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의 꽃일 뿐이다. 그 꽃들이 다 지고 나면 진짜 봄이 오던가….

  허지만 옆집의 할아버지가 가꾸는 꽃밭에는 겨울도 없던걸. 이름 모를 핑크빛 키 작은 꽃들이 정원 가득 한가롭게 웃고 있다. 인위적으로 피운 정성의 꽃이어서 오래 보기엔 싫증이 난다.

  겨울이 노루꼬리만큼 비켜 가긴 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내 작은 화단에도 어느날부터인가 붓대처럼 초록 새 잎이 삐죽이 나와 있는걸 몰랐었다. 신경쓰고 관리해준 적도 없는데 저 혼자서 쑥 올라와 봐 달라는 시늉인지? 시샘하듯 겨울 정서에 굶주려 건조해진 내 마음을 살폿이 달래준다. 대견하고 귀엽다.

  스물 스물 소리도 없이 거의 밤마다 내리던 비의 요정들이었나봐. 깊은 밤 내 창 밖에서 소곤거리는 그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내 잠은 깊은 꿈속에 파묻힌다. 아름다운 꿈속으로…….

  아주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 풀밭을 뛰놀던 아이적의 나를 만난다. 토끼풀꽃 가득한 들판, 나풀나풀 가볍게 뛰어 다니며 치마폭 가득 몰아 놓은 꽃들로 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고 꽃반지 엮어 손가락에 끼고 화관까지 멋지게 만들어 머리에 쓰면 금새 황홀한 어린 신부가 된다. 엄마 몰래 들고 나온 하얀 행주치마 어깨에 두르면 영낙없는 시집가는 새 색씨. 서로 내가 더 예쁘다고 뽐내며 깔깔거렸던  시절, 어렸을 때는 왜 그리도 어른이 되고파 흉내를 내며 놀았는지…….

  이제 그 한 세월이 다 지나갔다. 그 때의 소꼽친구이던 경자와 혜실이 옥자를 만나는 것도 꿈속에서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혹시 저 세상 가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나처럼 먼 타국에서 낯선 얼굴들과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 예쁜 옥자가…….

  그러나 꿈속에서 깨어나면 아직 봄은 멀리에 있음을 실감한다. 야박하고 매몰찬 현실. 꽃이 한창일 고국의 여름소식도 지금은 따끈따끈하지가 않다.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 커서 마음이 아플 뿐이다. 살아가기 힘드는 세상. 침체의 늪을 헤매는 교민경제도 어서 빨리 새롭게 돋아나 활기찬 삶의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비속에 피는 요정들의 겨울꽃을 닮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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