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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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돼지고기 반근

red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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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날 밤이었다. 어두운 얼굴로 나가신 아버지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발자국 소리가 우리 집 대문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소금이 물에 녹아 내리듯 내 몸도 슬픔에 조금씩 녹아내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귀 두 개뿐인 듯했다.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던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눈이 먼저 보고 머리로 연락을 취한 그 순간, ‘아’ 하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게시판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누군가 뒤에서 밀며 머리를 좀 치우라고 했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의 머리는 뒤에서 봐도 눈에 영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골목으로 접어든 바람은 모두 우리 집 대문을 흔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섣달 바람이 지루한 겨울 밤을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이려니 하고 생각하자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대문에 걸어둔 우편함도 덜컹대고 있었다. 자랑스런 대학합격통지서를 담게 되리라는 제 예상이 빗나가서 제 딴에도 꽤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젠 낡아서 틈새가 벌어진 대문 두 짝이 계속 삐거덕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쇠로 된 문고리가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내 속에서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람에 채이고 멱살을 잡히면서도 대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맨 앞에 서서 고스란히 비바람을 맞고 있는 대문, 자신이 보듬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참고 있는 대문을 보면, 나는 늘 아버지가 연상되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는 두 가지였다. 술을 드시지 않았을 때는 군인 출신답게 무게가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아주 규칙적인데 비해, 술을 드시고 오는 날의 발자국 소리는 구두 밑창이 바닥에 조금 끌리면서 장단이 좀처럼 맞지 않는 엇박자 였다.  


간간이 발자국 소리가 끊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때 골목 중간쯤에 있는 전봇대나 담벼락을 붙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지도 모른다. 희망이라는 것들은 죄다 하늘로 올려가서 이제는 따오지도 못할 별이 되고 말았다는 아버지의 푸념소리가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내 귀는 더 밝아졌다. 옆에서 잠든 동생들은 내 낙방소식을 잊었는지 편안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고, 안방에 계신 어머니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차라리 고마운 일이었다. 슬픔과 아픔에 절고 절어 내 몸이 오롯이 소금 한 줌으로 남는다 해도 나 혼자 감당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이 밤 어디에서 이 못난 딸의 아픔을 되새기고 있는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철커덕, 대문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내복 바람의 어머니도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마루로 나오셨다.   대문에 들어서는 아버지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아버지….”  


“어이구, 이 가서나야.”  


아버지도 목이 메는 듯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부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잠깐 있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잠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 꺼내려고 애를 쓰셨다.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손끝에 겨우 딸려 나온 것은 신문지에 둘둘 말린 무엇이었다. 마루 끝에 서 있던 어머니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돼지고기 반 근이다”  


내게 그 뭉치를 건네주시며 아버지는 내 어깨를 한번 짚으셨다.  


그 순간 속이 다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 품속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돼지고기 반 근을 손에 들고 나는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너거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너거들 소고기도 못 사 먹인다는 혼잣말을 하며, 아버지는 어머니의 팔을 잡고서 힘겹게 마루를 오르셨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식육점 문을 두드리는 아버지, 지갑을 펴 보며 ‘돼지고기 한 근’ 에서 ‘반 근’으로 다시 고쳐 말하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틀거리면서도 간간이 안주머니께를 더듬어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나는 마음 속 활시위를 한껏 당겨 아버지를 위한 별 하나를 쏘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낡은 구두를 비춰줄 별, 아버지가 올려다보면 어느새 어깨쯤까지 다정히 내려와 주는 별 하나를.  


슬픔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걸까. 그것은 고작 반근의 무게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신문지가 엉겨 붙은 돼지고기 반 근과 맞바꿀 수 있었던 그 날의 슬픔을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사랑은 한 손으로 들 수 없는 무게였다. 참으로 온전한 한 근이었기 때문이다.


■ 정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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