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학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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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화순 학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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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란 무엇인가, 두 번 보여준 양팽손 .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가 그것이다. 여기서 네 등급이 나온다. 옳으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다. 옳으면서 해를 입는 경우가 둘이고, 그르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셋이다. 그르면서 해를 보는 경우가 제일 낮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편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의로우면서 이로우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바둑에서 세력과 실리를 다 얻기는 어려운 법이다. 하나를 취한다는 것은 대체로 하나를 버리는 일이다. 의가 높은 것은 뭔가를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에는, 홀로 서 있어야만 하는 독존(獨存)의 냄새가 있다. 덕은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다(德不孤必有隣)고 했지만, 의에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홀로 감내해야 하는 실존의 지극한 고독이 있다. 생(生)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義)도 내가 바라는 것이되, 둘을 함께 얻을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捨生取義)고 맹자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옳음과 목숨을 저울에 달아보되, 종국에는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라는, 가을 서리 같은 말이다.

 

양팽손(1487~1545)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서화가이다. 호는 학포(學圃), 포은(정몽주)을 배운다는 뜻이다. 1510년(중종5) 27세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 시험에 조광조도 합격했으니, 둘은 젊은 날의 도반(道伴)이다.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현량과에 발탁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기도 하였다. 사가독서는 녹봉은 받으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재택유학’인 셈이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김정 등을 위해 항소하였다. 이 연명 소의 맨 앞에 이름(疏頭)이 양팽손이다. 이 일로 삭직되어 고향인 화순 능주로 돌아온다.

 

기묘사화는 훈구파의 반격이었다. 중종은 반정으로 집권한 인물이다. 그 공신이 117명에 이른다. 이중 76명이 공로도 없는 가짜라는 것이다. 파직하고 노비전답을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위훈삭제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아예 밥그릇을 깨는 일이다. 이복 형 연산군의 폐위로 왕이 되었는데, 반정공신들을 너무 몰아붙이는 것이 아닌가. 당초 사림의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지금은 왕의 권위까지 압박해 오는 피곤한 것이었다. 그때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네 글자가 나타나자 왕의 마음이 흔들린다. 중종은 결국 신진사림을 내치게 된다. 조광조는 화순으로, 김정 •기준 •김식 등도 귀양 갔다가 사사되었다. 김구 등 수십 명도 유배되고, 이를 두둔한 김안국 •김정국 등은 파직되었다. 사림파는 몰락했다. 훈구파는 모두 복훈 되어 직위와 부를 되찾았다.

 

1638년 김육이 찬술한 ‘기묘제현전’은 정광필 •안당 •조광조 등 팔현의 전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양팽손의 이름이 있고, 기묘록 속집에도 ‘교리 양팽손’이 나온다. 그는 조광조에 대한 ‘신구조정암선생소(伸救趙靜庵先生疏)’와 제현(諸賢)들을 위한 변론의 글을 써서 삭직된 것이다. 이 글이 학포유집에 전한다.

 

참 공교로운 것이 두 사람 남행의 종착지가 같다는 점이다. 정암과 학포, 생원시에 함께 합격한 동기이자, 정암이 다섯 살 많은 형제이자, 개혁의 길을 함께 걸었던 동지이자, 기묘의 화를 함께 입은 동병상련의 인연이다. 하나는 귀양 가고, 하나는 낙향하여 화순으로 내려온다. 정암은 능주읍 남성리 관비의 집에 안치되었다. 학포의 고향 월곡리와 십리거리였다. 1519년 12월20일, 겨울 북풍이 시리던 날, 조광조가 사사되기까지 둘은 25일을 함께 보낸다. 30대의 나이에 시국과 임금에 대한 울분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정암이 경(經)을 강하면 학포가 전(傳)을 논했다고 한다. 버려진 정암의 시신을 학포가 거둔다. 학포는 장남 응기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섣달 찬바람을 헤치고 60리 먼 길을 걸어 쌍봉리 뒷산 증리에 묻었다. 학포는 이듬해 정암을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으로 떠나보낸다. 빈 무덤 아래 죽수사를 지어 춘추에 제를 지냈다. 그 일로 장남 응기는 벼슬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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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 학포당

 

 

양팽손은 3년이 흐른 1521년 쌍봉사 가는 길 왼편, 정암의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재실(齋室), 학포당을 지어 은거했다. 학포당(전남도기념물 제92호)은 평삼문과 솟을삼문을 지나는 마당이 널찍하다. 정면, 측면 각 3칸의 팔작지붕이다. 툇마루를 둘러 가운데 방을 놓고 다락에 서고를 얹혔다. 학포당은 쇠락하여 1920년 후손 재경이 비를 세우고 중건한 것인데, 고아(古雅)한 옛 맛이 살아있다. 이 집을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은행나무가 백미다. 늦가을이 되면 노란 낙엽들이 이 집을 아늑하게 덮어준다. 밑동이 세 아름을 넘는다. 학포의 아들이 심었다는 내용이 유집에 전한다. 내년이 꼭 500년 되는 해다. 학포는 이곳에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유생들이 배움을 청하여도 “나의 죄를 무겁게 하는 일이다”라 하면서 문을 걸고 스스로를 유폐했다. 그는 산수도, 연지도 등을 그렸다. ‘묵죽도’는 굽히지 않는 절개를 표현한 당대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16세기 호남 화단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남도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544년 기묘사화의 원수라 할 김안로가 죽자 용담현령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했고, 이듬해 세상을 떴다. 향년 58세.

 

정암의 가묘 언덕아래 모옥으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 지금의 죽수서원이다. 훗날 조광조의 신원과 관작이 회복된 1570년 사액을 받아 죽수서원이 되었다. 1630년 양팽손을 함께 향사하였다. 두 사람은 죽어서도 죽수서원에 함께 있고, 용인 심곡서원에도 함께 있고, 정암 유배지에도 강론하던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남아있다. 조광조는 양팽손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면 난초의 향이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개인 후의 가을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다. 인욕을 초월한 삶이다.’

 

학포가 사화를 당한 제현들을 변론하는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몸소 폭악스럽게 도륙을 하신다면 어찌 충성을 바치’겠느냐고 임금에게 물은 뒤 ‘천지신명이 굽어보시는 처지에 사생영욕(死生榮辱)간에 구차하게 굴 수가 없다’라는. 학포는 삭직이 아니라 죽는다 하더라도 구차하게 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와 그들을 위해 글을 쓴 일,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일. 양팽손은 두 번, 의로움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것은 우정의 깊이와 인간의 신뢰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안위를 구차하게 돌아보지 않았다는 점이 더 반짝거린다. 맹자가 생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면, 생을 버리고 그것을 취하라고 했던 생사취의와 한 점 다르지 않다. 의를 궁행하는 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어느 순간이던지, 가슴 속에는 항상 창공을 박차 오르는 가을 매의 기상을 품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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