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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와 약자 그리고 빛나는 용기勇氣
여성혐오를 뜻하는 여러 가지 멸칭 중에 ‘맘충’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인 ‘어머니’나 ‘엄마’도 아닌 영어 mam에 한자인 벌레충蟲을 붙여 ‘맘충’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맘충’이라는 말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예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변질된 모성애로 자기 아이만 생각하는 매우 이기적인 엄마들이다. 그래서 이 단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아이와 엄마들을 혐오하는 여러 가지 유형의 댓글들을 접할 수 있다.
얼마 전 미미쿠키가 대형마트에서 구입한 과자를 유기농 우리밀로 만든 수제과자로 속여 판매하여 크게 논란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파생시킨 또 하나의 이슈가 있으니 바로 구매자들을 향한 맘충 혐오였다. 일부의 사람들은 미미쿠키 구매자들에게 유난 떠는 맘충들이 멍청해서 자초한 일이라며 엄마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이고, 그중 일부는 엄마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미성년자이며 가장 약자이다. 실제 몰지각한 엄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엄마이기 이전에 이미 몰지각한 사람이었을 확률이 크다. 내 주변의 엄마들은 대부분 아이들 때문에 피해가 갈까 노심초사하며 눈치 보기 바쁘다. 그리고 오히려 아이가 생긴 후 내 아이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타인의 아픔이나 사랑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고 더욱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도 조카들 덕분에 더욱 인격적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조카들과 동행할 때 더더욱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조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지하철을 탈 경우 일부러 좌석 근처가 아닌 곳으로 가서 서서 가곤 했었다. 조카들이 다리가 아프다고 해도 그 말 때문에 불편해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므로 그 아기들에게 조금만 참으라며 조용히 시키곤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내 조카들이 다리가 아플 텐데, 이 아이들이 나처럼 남들 눈치나 보는 자존감 없는 아이들로 자라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 미안함을 동시에 갖곤 했다. 식당에 가도 몇 번이고 죄송하다며 수저나 앞접시 하나만 더 달라고 하였고, 조카들이 혹시 일어서거나 큰 목소리를 낼까 늘 주의시키곤 하였다. 다행히 조카들은 내성적이고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이어서 남들에게 큰소리를 들은 적은 없지만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조카들이 소심하여 주눅 들까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엄마가 아닌 아빠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엄마가 식당 눈치를 보며 아이들 밥 떠먹이느라 자기들 입에는 밥 한술 제대로 떠 넣지 못할 때 당당히 밥을 먹었고, 식당에서 아이들을 위한 수저나 앞접시를 요구할 때 미안하다는 군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맘충 혐오 역시 여성을 향한 혐오의 일부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회의 최대 약자인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최다 약자인 여성, 그중에서도 엄마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노키즈존No kids zone, 아이와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 마실 수 없는 엄마들, 그러나 아이와 함께가 아니어도 카페에서 놀고 있는 맘충으로 보일까봐 차 한잔 마실 수 없는 엄마들! 결국 그들은 그저 엄마들이어서, 여자들이어서 벌레로 찍힌 건 아닐까.
송영림 소설가, 희곡작가, 아동문학가
■ 자료제공: 인간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