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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

0 개 1,269 김준

어제 한 학생이 홍조 띈 기쁜 얼굴로 학원 문을 들어섰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마지못해(?) 학원문을 여는것을 생각해보면 웬만큼 좋은 일이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입꼬리가 귀에 걸릴 수는 없을텐데..싶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제가 물어보기도 전에 술술 자랑스러운 한 사건을 털어 놓습니다. 몇 번의 고배끝에 드디어 Restricted license(제한 운전 면허)를 받았다 하더군요. 아이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이제 엄마 없이도 혼자 운전할 수 있다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초보시절을 경험해 본 한 사람으로서 마냥 축하해줄수만은 없었지요. 기분 좋은 것은 알겠지만 조심해서 운전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하며 당부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문득 몇 주 전 경험했던 재미있던 상황이 떠 오르더군요. 

 

어느 바쁜 일요일 오후였습니다.  

조금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않는 정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차가 밀려서 안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 시원히 달릴수 있는것도 아니고 딱 시속 20 ~ 30Km 정도를 왔다갔다 하며 어딘가 불편한, 아니 달림만못한 주행을 이어가고 있었지요. 어디 빠져나와 돌아갈 만한 길도 마땅히 없었기에 그저 한동안 시계만 확인해가며 앞 차를 따라갔는데요.. 한참을 가다보니 결국 그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바로 한 러너 운전자께서 도로안전운행 수칙을 지나치도록 철저하게 지키며 초저속 운행을 하고 계시더군요. 반대편 차선으로 스쳐 추월하면서 얼핏 살펴보니 그리 좁지않은 이마가 오후 햇빛에 번들거리는 것이 땀 깨나 흘리고 계신듯 했습니다.

 

 ‘뭐.. 누구나 그런때가 있는거지..’
한 번 피식 웃고 지나쳤습니다만.. 문제는 그런 ‘노란딱지 검은 L’이 한 두대가 아니었다는 거지요. 무슨 운전학원에서 단체로 교습을 나왔는지 도로는 때 아닌 개나리 밭이 되어 노란 네모들이 나풀나풀 살랑살랑 제 멋대로 종횡무진하는 러너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화창한 일요일 오후에 꽃밭을 경험했으니 행복하긴 했습니다만... 시간이...ㅎㅎ 러너는 참으로 불안합니다. 한국어로 초보운전자 정도로 해석될수 있는 뉴질랜드의 모든 러너들은 간간히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긴 심호흡을 하고 뺨을 두어번 착착 때려주고 괜시리 안전벨트를 탁탁 당겨보기도 하며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 합니다. 그들에게 운전은 빨리 능숙해져야만 하는 신문물이면서 동시에 가능하면 피하고 싶고 거르고 싶은 부담감입니다.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몇 번을 주문처럼 외워봐도 잘 하고 있지 않은건 매 한가지고 누군가 옆에서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해 주어야만 겨우겨우 엑셀러레이터를 1mm 만큼 밟으며 직진이라도 할 수 있는 러너들.. 

 

머리속엔 분명히 도로운행규칙들이 꽉 들어차 있건만 왠일인지 상황만 닥치면 갑자기 헷갈리고 모르겠고 당황스럽기만한 가련한 노란네모들은 도로 여기저기에서 극서행 운전을 하며 교통을 마비시킵니다. 

 

러너는 배우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그래서 아직 완전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고 대범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오늘은 초보, 내일은 람보’라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사실 우리 모든 운전프로들도 초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번 장보러 갔다오면 뒷목이 뻐근하고 이마 양옆이 말라가는 진땀으로 끈적했던 경험이 있기에 오늘 도로 여기저기에서 한창 운전공부에 열심인 느림보들을 눈 흘겨뜨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봅니다. 

 

그런데, 운전이야 이제 어디가서 눈치밥 먹지는 않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초보딱지를 뗄 수 없는, ‘만년 러너’일 수 밖에 없는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인생입니다. 세상 누구도 두번째, 혹은 세번째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고, 역사상 어떤 인물도 연습삼아 인생을 살아보다가 적당한 기회에 본 시험을 치르듯 삶을 선택한 적은 없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당연한 수순이고 그 이후엔 다시 살아볼 기회가 되돌아오지 않은것이 자명한 미래이기에 오늘 우리의 인생은 한 번 살고나면 수명을 다하는 일회용입니다. 

 

경험이 전무한 최초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고 때론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때론 극적인 반전을 통해 재기하기도 하는 도무지 종잡을 수도 없고 한치 앞을 예측할 수도 없는 다사다난을 겪습니다. 누구나 아픔보다는 즐거움이 좋고 빈곤보다는 풍요를 선호하는 법이니 어찌해야 덜 아프고 어찌해야 더 배부를지 궁금할 수 밖에는 없겠지요. 그래서 때로는 ‘땡땡철학관’에 찾아가 요 앞 사거리에서 어느 방향으로 꺽어야 운수가 대통할 지 물어보기도 하고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하며 조~ 앞에 다가오는 트럭이 나와 부딪힐지 아니면 그냥 스쳐 지나갈지 알려달라고 끊임없는 탑돌이에 정성을 쏟기도 합니다. 그뿐인가요.. 어차피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나서 막을 내릴지 모르는 초보인생, 사는게 뭐 별거있느냐며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 향락에 올인하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로 도로 위의 모든 자동차 들이 자신만을 노리고 달려드는듯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결국엔 인생면허증을 자진 반납하고야마는 안타까운 일도 종종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생이 한번 뿐이기에.. 딱 한번 최초로 살아보고는 이제 좀 알만하다 싶으면 막을 내리고야마는 단막극이기에 직면하는 러너인생운전자의 고민과 고뇌와 실수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러너 운전자들이라 해서 모두 같은 러너들인 것은 아닙니다. 개 중엔 엊그제 필기시험을 패스하고 오늘이 운전석에 앉아본지 딱 두번째인 러너도 있지만, 제한면허 시험에 몇 번 낙방하긴 했어도 운전실력만큼은 웬만한 Full license 운전자보다 나은 숨겨진 고수도 있습니다. 같은 노란딱지라고 모두 똑같이 무시했다가는 어느 틈에 민망한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이야기지요. 실력이 좋은 러너들을 그래서 종종 초보 중의 초보들에게 좋은 충고를 해 주기도 하고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기도 하며 자신이 지난번에 제한 면허시험에서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면서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조언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면허시험장 사무실에선 시험을 앞둔 러너들이 서로 처음보는 생판 남인데도 불구하고 친한 친구들끼리 대화하듯 정보를 주고 받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러 이러하면 붙는다더라, 이 시험장에선 조~기 걸어오는 수염 난 아저씨가 제일 깐깐 하다더라, 요즘 러너운전자가 너무 많아서 빨리빨리 제한면허로 바꾸어주려 한다니 아마 대부분 합격할 거다.. 등등 왁자하게 떠들어대는 그들 사이로 누군가의 수험번호가 불리워지고, 일어서는 수험번호의 등 뒤로 몇몇의 다른 러너들이 엄지를 치켜세워주고.. 그런 소란한 와중에도 재야 고수인 만년 러너는 ‘과속금지.. 과속금지..’를 주문처럼 외우며 눈 감고 팔짱낀 채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있고.. 이렇게 신참 러너들과 고참 러너들은 같은 초보들이면서도 경험자가 미경험자를 가르치고 익숙한 선배가 미숙한 후배를 돕는 진풍경을 연출합니다.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시는 학부모님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제 내가 말한다고 듣나요.. 고분고분 얘기들을 때 잘 잡았어야 하는데.. 이젠 뭐 어쩔 수 없고 지 좋은것 하라고 해야지요 뭐...’ 그렇지요. 어른이 되어서도 인생살아가는 것이 아리송한 판국에 자식 인생까지 떠 맡아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니니 어쩌면 ‘지 좋은것’하게 내버려두고, 가끔 도움이 필요할 때만 지원을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엑셀러레이터에 발 끝도 올려보지 못한 러너들입니다. 저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부모가 다들 똑같은 인생러너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한 두 번 시험에 떨어져 본 경험이 있고 어찌하면 합격한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알고 있는 정보들을 신참 러너에게 전수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들을 나이가 아니라는것.. 이미 누구나 그렇게 짐작하고, 또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겨우 밤 늦은 주차장에서 왔다갔다 몇 번 해 봤다고 곧 바로 모터웨이를 달릴듯이 덤벼드는 아이들에게 속도의 무서움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차는 만져보는 것도 겁이 난다며 게임기만 붙든 채 죽치고 있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운전석에 앉히는 것이 우리 고참 인생러너들이 해야 할 일인듯 합니다. 

 

8월이 코 앞입니다.

각종 시험들이 줄줄이 다가서는 불편한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공부보다는 다른 무엇에 정신이 빠져있는 초보 러너들에게 신호등이 바뀌었으니 엑셀러레이터를 밟아야 한다고 말해 주어야 할 듯 합니다. 아직 시간 많다며 자리만 뭉개는 러너들에게 시간과 효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눈 앞에 뻣은 도로를 시원하게 달려보고 싶지만 너무 겁이 난다며 울먹이는 그들에게 지난 경험들을 들려주며 응원하는것.. 우리 부모들이 해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다같이 기운을 내어서 초보는 중급으로, 중급은 고급으로 인생 러너 면허증의 격을 올리는 남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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