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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0 개 1,290 김준

드디어 몇 주 만에 그 두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쁜 일이 있다며 한 주, 학교에서 할 일이 남았다며 한 주, 또 무슨 일인가 핑계를 대어서 또 한 주.. 몇 번인가의 수업을 내리, 그것도 사이좋게 둘이서 빼 먹더니만 이번 주에야 빼꼼하게 학원문에 얼굴을 디밀고는 계면쩍은 인사를 했습니다. 이미 전화로 엄포를 놓은 뒤라서 이렇다 할 충고 내지는 꾸지람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괘씸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는 마음은 어쩔수가 없었네요.  

 

이 둘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동급생들인데 그 중 하나가 나이가 많아 형이 되었고 다른 아이는 자연스럽게 동생이 되어서 짝을 맞춰 노는데 열심인 철부지들 입니다. 그나마 형이라는 아이가 조금은 철이 들어서인지 공부할 분위기를 끌어가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동안 수업에 열중하다가도 뭔가 웃음보 터뜨릴 일이 떠 오르면 최소 5분동안은 낄낄대며 자리를 구르고 나서야 겨우 안정이 되는 사춘기호르몬의 부작용이 왕성한 두 소년들입니다. 

 

한창 인기있는 아프리카 TV의 BJ들 이야기가 나와도 데굴데굴, 정치인이 한 말 실수가 기억나도 데굴데굴,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라도 데 굴데굴 구르는 통에 바짝 눕혀진 학원 카페트가 되살아 날 틈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 두 녀석이 장기 결석을 했다고 해서 명색이 선생이라는 사람이 괘씸하게 여겨도 되느냐 걱정하실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난 2주간의 방학 동안 연말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이 학교 학생들을 위해 방학 특강을 했습니다. 학교진도는 그야말로 눈꼽 만큼 밖에 나가지 않아서 도대체 무슨수로 남은 과정을 시간내에 마칠건지 의아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은 2차적인 문제이고요.. 더 큰 문제는 그 눈꼽 만큼 배운 내용마저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핑계처럼 하는 말로는 수업시간에 별로 가르쳐주질 않으니 도무지 공부를 할 방법이 없다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렇게 백지장처럼 머리속을 눈 쌓인 설원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지요. 

 

여하튼 급박한 필요에 의해 대외광고도 못하고 결성된 IB 12학년 정리과정을 운영하는 동안 그 둘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도 공부를 했었습니다.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밤 10시가 거진 다 되어서야 끝나는 8일동안의 집중과정.. 뭐.. 간간히 잠도 자고 비디오도 보고 했지만 제 입으로도 말하기를 그 정도로 오랫동안 집중해서 공부한 것은 처음인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워낙에 책상앞에 앉아있기 싫어하는 녀석들 이야기이니 너무 큰 기대를 해서는 않될듯 하기도 합니다. 그 짧은 2주간의 시간을 활활 태우면서 저는 나름 뿌듯했습니다. 몇 되지 않지만 방학시간을 희생해서 학습과 정의 도약을 일구어내려 노력하는 청춘들이 대견했고 특히 그 동안 공부에는 담을 쌓았음이 확실해 보이던 그 둘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집에서 챙겨 온 스텐드를 켜 놓고 공부하는 뒷모습은 ‘이제 시작이다. 늦은감이 없진 않지만 뭔가 만들 수 있겠다’싶은 쾌재를 부르게 할 정도로 진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학이 끝나고.. 처음 수업이 있는 날..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바쁜일이 생겨버렸고 그 다음주는 학교에 일이 생겼고.. 속 사정을 뻔히 짐작하는 저는 두 주간 품었던 희망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고.. 일이 그렇게 된 겁니다. 

 

기대가 없었으면 밉지나 않았을텐데 내심 두 아이들을 키워갈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던 저는 솔직히 그 둘이 얄미워 보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수업 초반, 민망한 아이들과 속상한 선생님간의 어색한 시간이 지나고 나자 입담이 좋고 너스레를 잘 떠는 큰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 쌤. 제가요. 어릴때부터 전자회로 영재라고 사람들이 그랬거든요. 일단 전자공학과 딱 합격하고나면 저 진짜! 재미있게 열심히 공부할 거 같아요. 일단 합격하고 나면 그냥 다 쓸어버리는거죠. 제가..” 

 

“그래? 일단 그러고 나면 이단은? 이단 하고 나면 삼단은 어떻할래?” 

 

순간 튀어나온 아재개그를 잠시 눈 꿈뻑이며 해석하던 큰 아이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웃으며 제 개그감각을 꼬집으려고 입을 열려합니다. 주제가 흐트러지기 전에 제가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너네들 말야..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이순신장군한테 참패하고 결국 퇴각한 근본적인 이유가 뭔지 아니?” 

 

역사에 관심이 많은 큰 아이는 작은 아이가 입을 열 겨를도 주지않고 그 특유의 칼칼한 목소리로 그럴싸한 이유들을 이어갑니다. 당시 일본 내부의 분란, 선조가 데리고 올 원병에 대한 불안감, 예상치 않았던 의병활동 심지어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어서’등등.. 요즘 이순신장군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있던 터라 말문 이 쉽게 트이더군요. 

 

“바로 네가 조금 전에 말한 한 단어 ‘일단’때문이다.”  

 

“?”  

 

“일본군은 전통적으로 육지전에 강했지 해전에 강하지 못했거든. 섬나라 치고는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야. 어쨋던 그래서 그들의 전략은 ‘일단’상륙해서 북진하는 전략이었어. ‘일단’상륙만 하면 자신들의 장기인 육지전 기술을 총 동원해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갈 수 있었으니 말이지. 그래서 그들의 선단은 전투선단이라기 보다는 병력수송선단이었고 배에서 싸우다 배에서 전사할 각오로 갑판에 오른 선원보다는 최대한 안락하게 바다를 건넌 후 ‘일단’상륙해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누빌 각오로 무장한 군인들이 수송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 이순신장군의 혁혁한 무공은 바로 그들이 그 ‘일단’ 이라는 가정을 현실화할 수 없도록 기대감의 싹을 자름으로써 이루어진거야. 그런데도 일본은 연속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한양까지 점령하고도 퇴각하게 된거고 ..” 

 

뭔가 충격을 받은 듯한 큰 아이의 멍한 얼굴과 또 다른 의미로 멍한 작은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일단 시작한 쓴소리.. 끝을 보아야지요 

 

“네가 지금 계속 입에 올리는 ‘일단’.. 그래 그 일단이라는 가정이 현실화되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말이다. 인생의 문제라는 것들은 언제나 그 기대치 높은 단어 ‘일단’의 구현을 막는 방향으로 발생하는 법이다. ‘일단 이 고비만 넘기면 됩니다’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희 망을 걸수도 있지만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해 환자가 죽는 거고 ‘일단 취직만 시켜 주시면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라는 입사 지원생의 열정은 합격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기에 가없이 사그라지고 마는거야. 내가 지금 네 희망에 초를 치겠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자는 거야. 너는 지금 ‘일단’입학한 후에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준비하는것이 아니라 ‘일단’입학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 

 

그 동안 입버릇처럼 내 뱉던 그 한 단어가 생각만큼 간단한 의미의 단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긴장감이 되 돌아온 듯 얼굴이 굳은 큰 아이와 아직도 멍한 얼굴인 작은 아이.. 둘을 세워 놓고 전혀 딴판으로 생긴 친 형제간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하는 짓이 똑 같은 그 둘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감’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했 습니다만 얼마나 알아들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일단’은 가정형의 단어 입니다. ‘만약’보다는 더 의지적이고 확정적이지만 여전히 그 단어 안에는 기대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의 감각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인으로 나서는 첫 관문이자 전문성을 선택할 마지막 기회인 대학진학을 앞에 둔 학생들에겐 그들의 심리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이 ‘일단’이라는, 가정형이면서 동시에 의지적이며 또 한 희망과 계획과 지리한 공부에서의 해방을 내포한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삶을 조금 더 살아온 사람으로서 우리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일단’은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가정형이요 알지 못하는 미래형이지 확증되고 경험되는 현재 진행형의 단어일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디 남은 시간동안 ‘일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가정형을 진행형으로 탈 바꿈시키는 삶을 준비하는 우리의 아이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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