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키울까 고민 중이다. 얼마 전부터. 실은, 몇 년째.
작고 귀엽고 깜찍한 동물도 좋아하지만 그보단 좀 더 커다란 쪽이 취향인 탓에 고양이도 큰 대형묘를 키우고 싶다. 어떤 종이 있을까. 가장 대표적으론 래그돌(ragdoll)이나 노르웨이 숲(Norwegian forest), 메인쿤(Maine Coon)이 있겠지만 모두 뉴질랜드에선 구하기 어려운 (그리고 매우 비싼) 종들이다. 더군다나 독립해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가족들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점도 있고.
다행히 후자는 부모님과 동생의 배려로 해결되었다지만, 본격적인 문제는 언제, 어떤 고양이를 입양하느냐는 것이다. (왠지 데려오기도 전부터 설레발 치는 것 같다면 착각이 아니다.) 다만 이전부터 SPCA나 유기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하려는 생각은 했었고, 그래서 요즘도 꾸준히 버려진 동물들을 돌보는 보호소의 웹사이트들을 살펴보고 있다.
개와 비교하자면 나는 고양이와 그다지 많은 연을 맺지 못했다. 개는 많이 키워도 고양이는 (한국 문화 내에선) 상대적으로 예쁨을 덜 받는 동물이니까. 끽해야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고 나서 옆집이나 다른 이웃집에서 키우던 애완 고양이들 정도가 다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친했던(?) 고양이라면 아마 처음 이민 와서 살았던 집의 옆집에서 키웠던 고양이일 것이다. 이름은 ‘루이’였고, 때가 타서인진 몰라도 약간 털빛이 노르스름했던 버맨(Birman) 고양이였다. 옆집 아이들이 마침 내 또래였기에 함께 놀면서 친해졌고, 자연히 루이와도 보는 날이 많아졌다. 그랬는데, 유독 곁을 주지 않았던 고양이로 기억한다. 당시에 털 달린 생물은 다 좋다며 보기만 하면 쓰다듬고, 끌어안으려 들던 나였기에 더욱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낯을 많이 가리는 고양이들 입장에선 영 고역이었을 테니까. 이사를 오면서 자연히 루이와는 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뉴질랜드는 고양이들의 낙원이다. 로드킬의 위험이나, 여느 개념 없는 사람들의 무차별 폭력으로부터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은 안락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영유한다. 가장 신기했던 건 고양이를 집 안에 가둬놓고 키우는 대신 맘껏 안팎을 오가며 생활하도록 내버려두는 문화였다. 그러다가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하지만 대다수의 고양이들은 자기들 멋대로 바깥을 활보하면서도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들 집을 잘만 찾아간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곳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걸까. 범상치 않은 인지 능력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도 심심하면 옆집 고양이들께서 강림(?)하신다. 보통은 우리 집과 옆집들을 가르는 경계선인 나무 담벽 위에 올라 식빵자세를 하고 있다 (왜 그, 네 다리 모두 몸통 아래에 집어넣고 엎드린 자세 말이다). 그러다가 간혹 집안의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오면 고개를 휙 돌려 빤히 쳐다본다. 조금이라도 자기들이 있는 방향으로 온다 싶으면 부리나케 줄행랑을 친다. 가만 보고 있으면 괜히 내가 억울해질 만큼 빠르게.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건가, 싶어서.
가끔씩 일을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마주치는 고양이가 있다. 몸통과 머리는 까만데 뒷발들만 하얀 양말 고양이다. 금색 방울이 달린 녹색 목끈을 매고 있다. 이름도 모르는 이 고양이는 붙임성이 좋은 건지,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을 겁도 없이 따라다니며 멈추기를 종용한다. 잠시 멈출라 싶으면 곧바로 정강이에 얼굴과 몸통을 비벼대며 골골거린다. 욕심이 많은 건지 애교가 많은 건지 모르겠다. 나와는 종종 보는 사이여서 그런지, 날 보면 곧바로 앞에 엎드려서 유혹을 한다. ‘날 쓰다듬어라!’라는 것처럼.
그런 남의 집 고양이들을 보면 숨이 막히도록 귀여워서, 어서 빨리 나만의 고양이를 데려와야지, 하는 결심이 더욱 짙어지는 것이다. 비록 그게 언제쯤이 될 진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