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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0 개 2,510 박지원
큰 원이 있는 방 안에서, 남자는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동색 책상을 앞에 둔 채 검은 의자 위에 앉아 멍하니 촛불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경은 마치 19세기말 도쿄의 풍경처럼 낮은 건물들과 적은 차들과 몇 안 되는 가로등 불빛들. 그것은 밀도 낮은 프레임 내부를 연출하듯 그 남자의 앞에 있었다. 촛불 위에로 옅은 아지랑이가 조그만 도시의 한구석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딱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바람같은 것, 공기 같은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없이 손가락을 들었다가 손가락 끝의 굳은살을 이빨로 뜯어내었다. 아주 조그만 물렁뼈 같은 하얀 살점을 앞니를 이용해 잘근잘근 씹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서랍을 열어 펜을 들어서 무엇인가 적으려다가, 이내 서랍을 다시 열어 펜을 얌전히 넣어놓았다. 그러고 나더니 남자는 손바닥을 펴고 눈을 가렸다. 손바닥에 달린 손가락들을 벌렸다가 오므렸다가 했다. 빛들이 남자의 눈 속으로 들어와 산란하게 벌어졌다가 조명이 꺼지듯이 어두워졌다가 했다.

그러다가 손을 내린 후 고개를 뒤로 꺾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옛날 정크스타일로 꾸며놓은 베이지색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만져보면 꺼칠할 것 같은 천장은, 권태처럼 남자의 눈을 희미하게 눌러 내렸다. 손으로 만져보면 꺼칠할 것 같지만 만져보지는 않는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뗀 채 가공의 하늘처럼 공중에 있다. 자연을 회피하며 자연을 바라보기 위해 만든 껍질 같은 권태의 천장이 남자의 위에 얼마간의 간격을 둔 채 떨어져 있었다.

남자는 천장에서 내려온 사람 같은 표정으로, 약간 벌어진 입으로 다시 정면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은 약간 벌어져 있었다. 의미 없는 숨들이 세상에서 남자로, 다시 남자에서 세상으로 가만가만 이동하고 있었다. 숨은 이동하지만 숨이 운반하는 의미는 언어가 수반한다. 남자는 그러니까, 언어 없이 무의미를 수반한 바람 같은 것을 생산하는 기계처럼, 의자 위에 있었다. 무엇인가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지쳐보이지만 사실 지쳐있는 것은 아니고, 한가롭게 보이지만 한가로운 것도 아니었다.

치열해지고 싶지만 그만 나른해지고, 애정을 갖고 싶지만 나태해지고, 증오를 가지자니 자신이 두려워지고, 소유를 하자니 현실이 가볍고, 도피를 하자니 일상이 소소하다. 남자는 그저 그냥 말없이 무엇인가 퍼먹고, 싸고, 무엇인가를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루종일 불안해하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불을 펴고 정자세로 잠이 든다. 삶이 의자 위에 있다. 삶이 지나치게 안락한 의자 위에 있어서, 남자의 태도가 삶을 인식한다기보다는 삶이 남자의 태도를 인식하는 듯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남자가 삶을 쥐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초조한 권태만이 남자의 삶을 조각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창문 너머 밤 풍경의 낮은 밀도와는 다르게, 남자의 방은 점점 침묵이 고여가고 있었다. 조금씩 채워져가는 침묵의 농도에 촛불이 몸을 가늘게 흔들어댔다. 남자는 조금씩, 조금씩 몸을 타고 흐르는 맹렬한 초침소리에 눈꺼풀을 닫아 지구를 한 순간에 까맣게 만들어버렸다.

남자의 뜬금없는 금연이 8일째 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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