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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010. 12:32 NZ 코리아포스트 (219.♡.216.169)
자유기고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동거한다는 부산의 어느 언덕바지, 일제 강점기 때 묘소였던 자리라던가, 그런 그대로 옹기 종기 집들이 생기고 동네가 되었다. 작은 뜰 한 귀퉁이에 거의 뭉그러졌지만 불룩한 봉분이 그대로. 어느 집은 뒷곁에도 있고. 집 들어가는 문 옆에도 있다. 그런 것 아랑곳 않는 듯 덕지덕지 누더기로 된 판자문이며 집다운 집보다는 되는 대로 형편대로 지어진 집들이 좁은 골목을 내놓고 어깨를 맞대고 살아간다. 무게에 눌려 갈아 앉을 듯한 큼직한 물탱크가 지붕에 얹혀진 집도 있는걸 보면 수돗물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집집마다 거의 작은 화분들을 곳곳에 놓아 놓은걸 보면 저절로 미소가 어리고 싱그러운 삶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집과 집사이 골목길 지붕 한평도 안 되는 공간에 비닐로 싸서 만든 온실에도 꽃들이 화사하게 웃고 있다. 이웃이 한덩어리로 정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감동스럽다, 꽃은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다. 허지만 한뼘의 뜰이 없어도 그들의 마음밭에 가꾼 꽃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인 것일까? 이젠 너무들 잘 살아서 고층 아파트에 고급 빌라에 불편한 것 없이 가지고 살지만 문 꼭꼭 닫고 마음의 빗장도 단단히 걸어놓고 살아가니 이웃간에 인정이란 걸 잊고 사는지가 오래다, 동네 마당에 커다란 양은솥 걸어놓고 동지팥죽 쑤어서 모두가 함께 나눠 먹는 한 가족같은 이웃들. 오순도순 골목길에 나앉아 담소하는 모습도 이곳 사람들만의 진풍경이다, 아직도 이런 동네가 있다니. . .
인생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 어려운 시기가 있게 마련인지? 한때 그 비슷한 동네에서 살았던 때가 생각났다. 누군가가 수박 한통 사서 들고 오면 집집마다 한쪽씩이라도 갈라 먹기에 그 다음날은 그 수박맛에 대한 품평회가 자연스레 열리기도 한다. 고혈압 때문에 늘상 생 미나리를 씹으며 오리걸음으로 뒤뚱뒤뚱 걸어다니는 개성 아줌마. 장남을 서울 대학에. 차남을 일류대학 미대에 합격시킨 쾌거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방 두칸짜리 집에서 여섯식구가 복대기를 치면서 그야말로 다락방에서 일궈 낸 신화였다, 사회 일선에서 큰 재목이 되었을 그들의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젊어 한때 그 곳에서 진지한 삶의 자세를 배웠고 인생의 굴곡을 용케 벗어날 수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때만큼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살기가 쉽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어느집 김장 안 한집이 없건만 자기네 김치가 벌써 맛이 들었다고 맛배기를 들고 다니며 그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짜니 싱겁니 맵다는 둥 입맛대로 말하면서 깔깔대고. . . 부질없는 수다였을 뿐인데 풋풋한 삶의 향기로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 참 그런 일도 있었지! 우리 부부가 빙칭이란 별명을 얻게 된 날의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바보라는 말이었는데 그게 싫기 보다는 순수한 애칭으로 더욱 깊은 정이 들어갔다.
그 때는 쥐들의 극성도 대단해서 귀찮은 동거를 해야만 했다. 허술한 집이 제일 싫었던 것도 아마 그 쥐들 등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날인가 안방 다락에 놓은 쥐덫에 걸린 쥐가 밤새도록 뛰며 난리를 피우는데 남편은 나보다 더 겁보였다. 아침에 다락문을 열어 보지도 못하고 나가면서 "어떡해?" 하는 내게 사람사서 치우란다 (세상에 . . . 덫에 물린 쥐를 사람사서 치우라니) 어이가 없었다. 죽었는지 조용한데 나도 다락문을 열지 못했다. 한나절 밖에 수다판이 벌어진 아줌마들한테 내 걱정꺼리를 얘기했더니 한바탕 웃음꽃이 만발한다. 우리부부가 빙칭이가 되는 순간 아닌가. 걸걸한 경상도 아줌마 말출이 엄마가 나선다. "가 보자 마. 까짓 죽은 쥐 하나 어찌 못하나" 다락문을 벌컥 열어 보니 발에 덫을 단채 계단으로 내리 박힌 쥐가 살기 어린 눈으로 이 쪽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나 무섭고 징그러웠는데 그녀가 끈에 묶인 쥐덫을 들고 골목 밖 시궁창 물이 흐르는 개울로 들고 갔다, 모두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었을 그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 때 그 시절 골목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 콩 한 톨도 나눠 먹으며 끈끈한 인정 속에 푸근하게 삶을 살아가는 풍경.
아련하게 잊혀져 가는 그런 세상 속에서 지금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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