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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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011. 18:15
김영나 (202.♡.85.222)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하루에 두 번, 하늘에는 더블 캐스팅 된 배우처럼 해와 달이 떠오른다. 달이 퇴장하는 새벽과 해가 퇴장하는 일몰의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위험하고 불길하다. 어슴푸레한 어둠은 혼란, 혹은 미혹(迷惑)의 늪이기 때문이다. 저 멀리 들판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녀석이 개인지 늑대인지? 내 곁에서 충성심을 발휘하던 개가 늑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름달이 뜨면 불길하게 울어대고 닭을 약탈하던 늑대가 친근한 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합리와 불합리, 이성과 비이성, 희망과 절망이 모두 흐릿한 입자로 떠돌아다니는 시간이다. 11월 26일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나날들이었고 ‘시면 떫지나 말지’ 헛헛한 공약들이 허공을 온통 어슴푸레 물들이고 있을 때였다.
존 키 총리는 국민당이 재집권할 시 ‘미래는 매우 낙관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집권하는 3년 동안 뉴질랜드를 떠난 사람들이 10만명에 이른다. 집권 3년째는 일년 동안 8만 4천명이 뉴질랜드를 떠났으니(채널 3TV, 10월 25일 방송), 점점 악화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까. 같은 시기 페어팩스 미디어에서 1천 4백명을 조사했는데, 18세에서 30세 사이 젊은이들 중 24%가 뉴질랜드를 떠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세계 은행은 지난 해 회원국 중 최대 두뇌유출 국가로 뉴질랜드를 꼽았다. 호주 대졸자의 2.5%가 해외 취업을 하는 반면 뉴질랜드는 그 10배에 해당한다고. 인력 유출은 곧 국부 유출이다. 인력 유출은 저임금과 고세율, 비싼 주거비용,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인데, 신통한 해법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만약, 호주와의 임금 격차를 줄이겠다는 공약이 지켜졌다면? 호주와 뉴질랜드의 최저 임금 격차는 시간당 5달러($NZ) 정도. 하루 8시간 일했을 때 한 달이면 8백불이나 된다. 엉뚱한 다리 긁으며 ‘시원하지?’ 묻는 양상은 다른 정당도 마찬가지다.
노동당은 과일과 채소에 GST를 면제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생계비 중 과일과 채소 구입 비용이 몇 퍼센트나 될까? 과일과 채소를 먹지 못해 뉴질랜드를 떠나겠는가?
복지는 줄어들고 개인의 기본권은 바닥에 떨어지고, 소외된 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은 들어줄 이 없고, 지도자의 신념과 철학은 부재 중이고, 희망의 빛은 모두 흩어지고, 어슴푸레한 절망의 입자들만이 지구촌을 떠돌고 있다.
두 달 전, 미국 뉴욕 월가에서 부익부 빈익빈, 청년 실업, 비정규직의 낮은 임금에 대한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전쟁에 쓰는 돈 청년 실업에 투입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던 시위대는 월가에서 오클랜드(Oakland )항구로 이동했다. 그곳에도 오클랜드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와 무관하지 않고, ‘전 세계 서민들은 힘들다’라는 글로벌 기류가 ‘오클랜드’라는 상징성을 띠고 등장한 것인가? 급한 수혈이 필요한 미국은 한국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
한국은 한미 FTA 반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천 5백 페이지에 이르는, 그것도 영문으로 된 FTA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더구나 미래에 벌어질 시장의 생리는 예측하기 힘들어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항목마다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미 FTA 찬성측은 윈윈 게임이 될 것이라고 젖보채는 아이처럼 비준을 재촉하고 있다. 반대측은 제로섬 게임이라며, 한국이 고스란히 패자가 될 것임을 멕시코의 예를 통해 강변하고 있다. 교민들은 물론 한국을 등에 업고 사업체를 꾸려가는 이들은 한미 FTA로 인해 자신의 사업체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 분석하고 여론을 형성할 때다.
11월 둘째 주, 코리아 포스트 자체 여론 조사에서 노동당이 58%, 국민당은 35% 안팎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반면, 9일 실시된 페어팩스 미디어의 여론조사는 국민당이 52.5%, 노동당이 25.9%. 오차 범위 3% 안팎의 현지 조사와 코리아 포스트 조사는 정반대 결과다. 20세기가 저물고 21세기가 떠오를 즈음 활짝 열린 문고리를 잡고 뉴질랜드에 입성한 이들의 향수 때문일까? 그때는 좀 흥청거리고 사람 사는 맛이 났었다. 장기사업비자로 이민자들이 밀려들어오고 원화 대비 환율이 5,6백원대여서 유학생도 넘쳤다. 소규모 사업체를 운영하는 많은 이민자들이 신바람나던 시대였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떠나보낸 사람 숫자로 치자면 백년쯤 지난 것 같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오래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저 황량한 광야 속으로 모두 떠나고 말 것이다.